◉ [책소개] 『지구별 여행자』
류시화 시인이 15년에 걸쳐 인도 대륙을 여행하면서 얻은 삶의 교훈과 깨달음을 기록한 글 모음집입니다. 총 34개의 본문 글과 사두(힌두교의 고행 수도승) 어록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나는 여행이 좋았다.
삶이 좋았다.
여행 도중에 만나는 기차와 별과 모래 사막이 좋았다.
생은 어디에나 있었다. 나는 사람들이 켜놓은 불빛이 보기 좋았다.
내 정신은 여행길 위에서 망고 열매처럼 익어 갔다.
그것이 내 생의 황금빛 시절이었다. 여행은 내게 진정한 행복의 척도를 가르쳐 주었다.
......
위 글은 머리말 중 일부로서 류시화 시인의 여행에 대한 생각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일부에서는 류시화 시인의 인도에 대한 글이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는 등의 여러 비판이 있긴 하지만, 전문 여행 안내서가 아니라 개인적인 인도 여행기라는 관점에서 봤을 때에는 문제될 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류시화 시인의 눈으로 (재)창조된 글을 보면서 독자가 감흥을 받을 수 있다면 이 보다 더 좋을 수 있을까요?
▣ 『지구별 여행자』 / 류시화 / 김영사 / 2002.11.22. 1판 1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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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망고 주스 (16~22쪽)
우리는 누구나 여행자다.
우리 모두는 이 세상에 여행을 온 것이다. 더 배우고, 더 경험하고, 더 성장하기 위해..... 이 여행을 마치고 떠나갈 때, 나는 신 앞에서 서서 이것 하나만은 말할 수 있다. 나는 여행자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노라고. 그래서 늘 길 위에 서 있고자 노력했노라고. 내 배움은 학교가 아니라 길에서 얻어진 것이라고.
차창 밖으로 온통 오렌지빛 태양이 쏟아지는 북인도 들판을 지나 기차가 럭나우 부근의 한 역에 섰을 때, 나는 갑자기 망고 주스가 마시고 싶었다.
하지만 역 구내 어디를 둘러봐도 콜라와 환타만 있을 뿐. 내가 원하는 망고 주스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기차가 잠시 정차한 틈을 타, 옆사람에게 배낭을 맡기고 재빨리 역 밖으로 망고 주스를 사러 나갔다.
인도에선 계속해서 무엇인가를 마셔야만 한다. 그것이 인도 여행에서 지켜야 할 수칙 중 하나다. 그렇지 않으면 태양열에 몸의 수분을 빼앗겨 탈수증에 걸리거나, 심하면 영혼까지 메말라 버리기 십상이다. 처음 인도 여행을 할 때 사흘 동안 아무것도 마시지 않고 기차 여행을 한 결과, 나는 나무랄 데 없는 고행 수도승이 되어 있었다.
역 앞의 한 가게로 뛰어갔을 때, 진열장에 망고 주스 몇 개가 나란히 포개져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나는 서둘러 안으로 들어갔다.
가게 안에선 한 남자가 가게 주인에게 뭐라고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그는 손목에 금팔찌와 금시계를 차고 있었는데, 목에도 영락없이 금줄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내가 그 금붙이들을 유심히 바라보자, 남자는 씩 웃으며 자기는 시내에서 금은방을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자기가 좀 차고 다니다가 팔기도 하고 그러는 것 같았다. 웃을 때 보이는 금이빨은 어찌할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남자가 대화를 끝내고 나가자, 나는 얼른 가게 주인에게 다가가 힌두어로 말했다.
"주주헤 푸르티 디지예!"
그러자 늙은 가게 주인이 영어로 말했다.
"망고 주스를 달란 말이지?"
내가 다시 힌두어로 말했다.
"잘디 잘디 디지예!"
그가 다시 영어로 대꾸했다.
"빨리 달란 말이지?"
노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에 걸치고 있는 흰색 도티(인도 남자들이 입는 치마처럼 생긴 옷)를 느릿느릿 고쳐 입었다. 그런 다음 거의 시속 10미터의 속도로 천천히 망고 주스를 향해 다가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꾸물대다간 기차를 놓칠 염려가 컸다. 기차뿐만 아니라 기차에 두고 온 배낭까지 몽땅 잃어버릴 판이었다. 그 금붙이 남자 때문에도 몇 분을 지체했었다.
나는 속이 타서 다시금 서툰 힌두어로 노인을 재촉했다.
"바바지, 잘디 잘디! 데르호 가이 하이!"
노인은 속도를 낼 생각은 하지 않고, 뚝딱거리는 인도식 영어로 맞받아쳤다.
"시간이 없으니까, 서두르란 말이지?"
그리고 나서 그는 말했다.
"서둘러서 얻을 건 아무것도 없어. 서두르다간 오히려 잃기 마련이다."
그렇게 훈계를 한 뒤, 노인은 더욱더 느린 동작으로 진열장을 향해 나아갔다. 그렇다고 다 늙은 사람을 뒤에서 떠다밀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연신 기차역을 돌아보며 초조하게 기다렸다.
드디어 진열장 유리문이 힘겹게 열리고, 마치 아잔타 석굴에서 발굴한 것처럼 먼지가 수북히 쌓인 망고 주스 다섯 개가 꺼내어지기까지 한참의 세월이 걸렸다. 그리고 그것이 다시 까만 비닐 봉지에 담기기까지는 족히 백 년은 더 걸렸다. 나는 너무도 초조한 나머지 소변이 다 마려울 지경이었다.
노인의 손에서 망고 주스 봉지를 거의 빼앗다시피 하고서, 나는 서둘러 돈을 건넸다. 잔돈을 준비하지 않는 것이 그날의 가장 큰 실수였다. 노인은 내가 지불한 백 루피짜리 지폐를 마치 위조 지폐라도 되는 양 한참을 이리 뒤집어 보고 저리 뒤집어 본 뒤, 돈을 이마에 갖다 대고 시바 신께 기도까지 올리는 것이었다.
그런 다음 돈통을 열러, 잔뜩 뜸을 들이며 때묻은 동전들을 하나씩 카운터 위에 늘어놓기 시작했다. 1루피짜리, 2루피짜리, 심지어 잘 쓰지도 않는 10파이샤와 50파이샤(파이샤는 100분의 1루피) 동전까지 등장했다. 어찌나 주의 깊게 동전들을 선택해 꺼내 놓는지, 그 사이에 인더스 강에서 두세 개의 문명이 발생하고도 남을 긴 시간이 흘렀다.
마침내 노인이 거스름돈을 다 꺼내 놓았을 때, 기차가 꽈앙하고 기적을 울렸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게 된 나는 재빨리 카운터 위의 동전들을 손바닥에 쓸어 담았다. 그러다가 그만 동전 몇 개가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내가 얼른 허리를 굽혀 팔랑개비를 도는 동전들을 주워 모으자, 노인이 느린 어조로 일침을 가했다.
"서둘러서 되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내가 방금 전에 말했지. 서두르다간 오히려 잃기 십상이야."
노인이 뭐라고 떠들든, 나는 부리나케 동전들을 주워 들고 날쌘돌이처럼 기차를 향해 뛰어갔다. 구름다리를 건너 내가 헐레벌떡 자리에 돌아온 뒤 기차는 헛기적만 울려 댈 뿐 도무지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인도의 기차답게 서두를 게 하나도 없다는 식이었다.
무사히 기차에 올라탔다는 안도감과 함께, 왠지 모를 허무감이 가슴 밑바닥에서 밀려왔다. 때로 예기치 않게 찾아오는 이 허무감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걸까?
망고 주스를 사러 뜨거운 태양 아래를 뛰어다녔기 때문에 더욱 목이 말랐다. 갈증도 식히고 까닭 모를 허무감도 달래는 데는 뭐니 뭐니 해도 인도산 망고 주스가 최고 아닌가.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망고 주스가 보이지 않았다.
동전을 주워 갖고 달려오느라 주스가 든 비닐 봉지를 가게 카운터 위에 그냥 놓고 온 것이다. 나는 더없이 절망스럽고, 영혼까지 허무해져서 눈을 감고 자리에 쓰러졌다.
망고 주스가 없다고 생각하니 아까보다 더 목이 탔다. 그러나 금방 떠날 것처럼 울부짖는 기차를 다시 두고 가게까지 갔다 올 순 없는 일이었다.
내가 못내 아쉬워하며 차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가게 쪽 하늘을 쳐다보고 있을 때였다. 흰색 도티를 입은 한 노인이 플랫폼 저쪽에서 느릿느릿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손에 까만 비닐 봉지를 들고 있는 것이, 틀림없는 그 가게 주인이었다!
나는 너무나 반가운 나머지, 목청을 다해 소리쳤다.
"여기예요, 여기!"
그 순간, 기차가 꽈앙 하고 인정사정없이 기적을 울려 댔다. 기차는 정말로 떠날 것처럼 덜컹 하고 움직이기까지 했다. 나는 너무도 안타까워 창 밖으로 손을 내저으며 몸부림쳤다. 이러다간 정말로 망고 주스를 영영 놓친 판이었다.
나는 노인에게 좀더 속도를 내라고 힌두어로 다그쳤다.
"이다르 잘디 잘디 아이예!"
상황을 알아차린 앞좌석 인도인들도 덩달아 차창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응원을 했다.
"바바지, 잘디 잘디 아이예!"
그러거나 말거나 노인은 여전히 시속 10미터의 속도를 유지한 채, 그 와중에도 영어로 맞받아쳤다.
"나더러 빨리 오란 말이지?"
노인이 거의 다 와가는 순간, 마침내 기차가 출발했다. 나는 만화영화 속 주인공처럼 팔을 두 배나 길게 늘어뜨려 가까스로 노인의 망고 주스 봉지를 낚아챘다.
나는 노인이 베풀어 준 수고로움에 감동해 차창 밖으로 손을 흔들며 노인에게 소리쳤다.
"수크리아, 바후트 수크리아!"
그 순간 노인이 손가락으로 허공을 찌르며 영어로 소리쳤지만, 기차가 멀어져 잘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가 뭐라고 소리치는지 충분히 알고도 남았다.
"대단히 감사하단 말이지? 서두르다간 오히려 잃기 마련이고, 내가 분명히 말했지. 그것을 절대로 잊지 말라구!"
노인의 말에 화답하듯 기차가 또다시 기적을 울리고, 노인이 멀리 짐이 되어 사라질 때까지 나는 손을 흔들고 또 흔들었다.
기차가 여유롭게 북인도 평원을 달리는 동안, 나는 새처럼 쭉쭉거리며 망고 주스 다섯 개를 앞좌석 인도인들과 나눠 마셨다. 인도산 과일 주스의 달콤한 맛도 맛이지만, 힌두 노인의 친절함과 속 깊은 지혜가 더 깊이 내 영혼의 갈증을 식혀 주었다.
[2] 원숭이가 공을 떨어뜨린 곳에서 다시 시작하라 (32~36쪽)
12년마다 한 번씩 열리는 인도 최대의 축제 마하 쿰부 멜라에 참석하기 위해 설레는 마음을 안고 뭄바이 공항에 도착한 나는 출발부터 예상 밖의 장애물에 부딪쳤다. 델리 행 연결편 비행기가 짙은 안개를 이유로 이륙이 취소된 것이다. 하는 수 없이 뭄바이의 한 호텔에서 하룻밤을 묵었으나, 북인도 대륙을 장악한 히말라야의 안개는 도무지 물러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급한 마음에 기차역으로 달려갔지만, 어찌나 사람이 많은지 표를 구하기는커녕 표 파는 직원에게 말 한 마디 건네기조차 불가능했다. 외국인 전용 창구는 보름 치의 예약을 마감한 지 오래였다.
그렇게 해서 한 달 전부터 치밀하게 짜놓은 나의 마하 쿰부 멜라 행 계획이 여지없이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도중에 묵을 호텔 예약도, 미리 사둔 특급 열차표도, 축제가 열리는 장소의 게스트하우스 예약도 무용지물이 되었다.
더구나 축제에 함께 가기 위해 도중에서 만나기로 한 인도인 친구들과 멀리 유럽에서 오기로 된 친구와의 약속도 지킬 수가 없게 되었다. 각자 축제 장소로 간다 한들, 그곳에서 서로를 찾기란 시바 신의 능력으로도 어림없는 일이었다. 공식 집계 3천만 명. 비공식 집계 5천만 명이 참가하고 하루 실종자 신고 수가 2만 5천 명에 달하는 그야말로 은하계 최대의 축제가 아닌가!
나는 더없이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12년 전에도 이 축제에 참석하기 위해 기차를 탔었다. 그런데 출발하자마자 심한 열병에 걸려 그만 도중에 돌아가야만 했었다. 그리고는 여행이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 버려 축제 장소로부터 영영 멀어지고 말았다.
그런데 12년이 지난 지금, 또다시 마하 쿰부 멜라 축제가 내 눈앞에서 멀어져가고 있었다. 기차로도 수십 시간이 걸리는 먼 거리를 택시를 타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때 내 앞에 나타난 인도인 남자가 바로 미스터 굽타이다. 아라비아 해가 바라다 보이는 한 여행사에서 만난 미스터 굽타는 컴퓨터를 사이에 두고 조용히 내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나는 어떻게든 마하 쿰부 멜라 축제에 가겠다는 열의로 가득차 있었고, 동시에 그것이 좌절될 것만 같아 실의에 차 있었다. 오랜 인도 친구들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된 것도 마음을 무겁게 했다. 연락을 하려고 아무리 시도를 해도 늘 그렇듯 전화마저 불통이었다.
사실 인도 여행 중에 이런 일을 겪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번번이 비행기가 취소되고 기차가 연착하는 바람에 예정대로 여행을 하기가 힘이 들었다. 예약은 뒤바뀌고, 약속은 간단히 무시되고, 심지어 음식을 주문해도 엉뚱한 요리가 나오기 일쑤였다. 여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장애물 경기를 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많았다.
콧수염이 잘 어울리는 50대 초반의 미스터 굽타는 내 얘기를 다 듣고 나서 심부름하는 아이를 시켜 짜이 두 잔을 주문했다. 그러는 사이에도 나는 점점 인도의 이 예측 불가능한 상황에 대해 불만이 커져 갔고, 여행의 피로까지 겹쳐 허탈하기 이를 데 없었다.
뿐만 아니라 기차역 앞에서 탄 오토 릭샤가 회교도들의 폭동을 핑계로 멀리멀리 돌아오는 바람에 잔뜩 기분이 나빠져 있었다. 회교도들이 폭동을 일으켰다거나 천민들이 데모를 한다는 등, 또는 홍수로 길이 무너졌다고 하는 것이 인도 운전수들의 상투적인 수법인 걸 내 모를 리 없었다.
수줍은 미소를 가진 인도 소년이 배달해 온 짜이를 권하며 미스터 굽타가 말했다.
"당신의 여행 일정이 헝클어진 건 참으로 안 된 일이오. 하지만 인도를 여행하는 당신에게 내가 한 가지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소."
그는 짜이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인도가 영국의 식민지였을 때의 일이오. 영국인들은 인도에서의 골치 아픈 생활을 잊고 여가도 즐길 겸 캘커타에 골프장을 하나 만들었소. 그런데 골프를 칠 때마다 예상치 못한 방해꾼이 나타난 것이오. 그것은 다름 아닌 원숭이들이었소."
그의 설명에 따르면, 원숭이들은 영국인들이 쳐 올린 골프공이 필드에 떨어지자마자 얼른 집어가 엉뚱한 곳에다 떨어뜨리곤 했다. 당연히 경기는 지연되고 매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화가 난 영국인들은 골프장의 담장을 두 배로 높였다. 하지만 담타기의 명수인 원숭이들에게 그까짓 높이가 문제될 리 없었다. 영국인들이 그 작은 공에 그토록 미친 듯이 집착하는 것을 본 원숭이들은 더욱 신이 나서 골프장을 이리저리 다녔다.
미스터 굽타가 말했다.
"결국 영국인들은 새로운 골프 규칙을 만들 수밖에 없었소. 그것은 '원숭이가 골프공을 떨어뜨린 바로 그 자리에서 경기를 진행하라'는 것이었소. 물론 이 새로운 규칙은 예상 밖의 결과를 가져오기 마련이었지요. 엉뚱한 곳으로 골프공이 날아갔는데 원숭이들이 그 공을 주워다 홀컵에 떨어뜨리는 행운을 맛본 사람도 있었고......"
또한 간신히 홀컵 가까이 공을 보냈는데, 원숭이가 재빨리 집어가 물 속에 빠뜨리는 불운한 경우도 있었다. 행운과 불운이 매번 교차하는 사람도 있었다.
다시 짜이 잔을 들며 미스터 굽타가 내게 물었다.
"영국인들이 그 골프 경기에서 배운 것이 무엇인지 아시오?"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그 경기를 통해 무엇을 배웠는지 알 것 같았다.
그들은 골프 경기만이 아니라 삶 또한 그렇다는 것을 배웠을 것이다.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자신의 계획대로 다 조종할 수 없다는 것을, 매번의 코스마다 긴꼬리 원숭이가 튀어나와 골프공을 엉뚱한 곳에 떨어뜨려 놓는 것이 바로 우리의 삶이라는 것을!
미소를 지으며 미스터 굽타가 말했다.
"당신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충고는 바로 이것이오. 좌절하지 말고 즐거운 마음으로, 원숭이가 골프공을 떨어뜨린 바로 그 자리에서부터 여행을 계속하시오."
물론 나는 그의 충고를 받아들여, 시바 신의 심부름꾼인 하누만(인도의 원숭이 신)이 정해 준 그 자리에서부터 다시 여행을 시작했다. 며칠 늦기는 했지만 끈기를 갖고 기다려 준 인도 친구들과도 감격적으로 재회할 수 있었고, 12년 동안 벼르고 별렀던 마하 쿰부 멜라 축제에도 참석해 새벽의 갠지스 강물에 무사히 내 카르마를 씻어 보낼 수 있었다.
멋진 충고가 아닌가.
원숭이가 경기를 방해할 때마다, 원숭이가 공을 떨어뜨린 바로 그 자리에서부터 다시 시작하라!
[3] 피니시 (230~233쪽)
"압 캬 카르 라헤헤(뭐 하고 있나)?"
누군가의 손이 척하고 어깨에 와서 얹혔다. 고개를 돌리자 매섭게 생긴 힌두 노인이 독수리 같은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노인은 때가 꼬질꼬질한 주황색 목도리를 목에 두르고 있었다. 얼굴에는 몇 군데 곰보 자국이 있고, 웬일인지 한쪽 눈에는 흰 백태 같은 것이 끼어 있었다.
나는 대답을 하는 대신 강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강에는 지금 멀리 시베리아에서 날아온 겨울 철새들이 분주히 자맥질을 하고 있었다.
"캬 카르 라헤헤(뭐 하고 있냐니까)?"
노인이 또다시 다그쳐 물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쿠츠 나힌(아무것도)."
그 순간, 새들이 일제히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마치 내가 모르는 어떤 신호라도 있었던 듯 새들은 강 상류 모래 언덕 위를 한 바퀴 돌고 나서 먼 하늘로 사라졌다.
그러자 내가 보고 있던 것이 더욱 뚜렷해졌다. 새들이 앉아있던 곳에 흰 물체 하나가 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것은 모래 언덕의 일부처럼 보였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그것은 사람이었다. 새들이 그 위에 올라앉아 있었기 때문에 처음엔 그 것인 사람인 줄 몰랐었다.
그 시체는 모래 언덕 근처의 얕은 수면에 미동도 하지 않고 떠 있었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분간할 수도 없이 물 속에 고개를 처박고, 한 손으로는 풀줄기를 움켜잡고 있었다. 죽기 전에 그런 건지, 아니면 강물에 떠내려오다가 풀이 손에 엉킨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것은 더 이상 떠내려가지도 않고 그렇게 모래 언덕 옆 풀숲에 마냥 정지해 있었다.
인도에서는 성자를 비롯해 몇몇 사람의 경우는 화장하지 않고 시체를 그냥 강물에 던진다. 이윽고 노인도 내가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지 알아차렸다. 그는 내 옆에 서서 흰 백태 낀 눈으로 한참 동안 그것을 바라보았다.
"아차(알겠군)!"
마침내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꼬쟁이처럼 마른 다리로 성큼성큼 그쪽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는 근처에 있는 기다란 나무 막대기를 주워 시체를 강 안쪽으로 힘껏 떠다밀었다. 노인이 몸을 숙이는 순간, 목에 두르고 있던 주황색 목도리가 강물로 떨어졌다. 노인은 시체를 떠밀던 막대기로 얼른 자신의 목도리를 건져 올렸다. 목도리에서 떨어지는 물방울들이 저녁 햇살을 받아 소리없이 반짝였다.
생의 어떤 순간!
문득 나를 둘러싼 세상이 하나의 슬로 모션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전거를 타고 강둑을 지나가는 남자, 저녁 기도를 준비하는 늙은 성직자, 먼 하늘에서 무리지어 다시 날아오는 새들의 날개짓......
시체는 물살에 떠밀려 내가 서 있는 쪽으로 느릿느릿 흘러오기 시작했다. 그것이 내 앞을 지나갈 때 보니 오른손은 여전히 풀줄기를 움켜잡고 있고, 두 다리는 힘없이 물 위에 떠 있었다.
'저 손으로 누군가를 만졌겠지.
온 존재로 사랑했겠지.
저 다리로는 수많은 길을 걸어다녔지. 돈도 벌러 다니고, 하루에 한 번은 신에게 기도하기 위해 사원의 계단을 걸어 올랐겠지.
때로는 힌두 음악에 맞춰 춤도 추었겠지. 생의 기쁜 순간, 슬픈 순간을 온몸으로 맞이했겠지.'
한때 생생한 혼이 깃들었던 한 인간의 육신이 그렇게 천천히 강 하류로 흘러갔다.
신과 대지의 이마가 맞닿은 일몰의 시간.
생의 여행을 마치고 우주의 품으로 귀환하는 한 영혼이 그곳에 있었다. 그는 먼 벵골 만 바다까지 흘러갈 것이다. 물 속에 얼굴을 처박고 지난 생의 일들을 꿈의 화면으로 재생하면서.
그리하여 그는 또다시 다음 생의 여행을 꿈꾸리라.
저 겨울 철새들처럼 언젠가 또다시 인도땅에 돌아오리라. 이 곳은 꽃과 태양과 비의 나라가 아닌가. 사막과 만년설의 나라, 인간의 영원한 깨달음을 축복하는 신들의 나라가 아닌가. 누군들 또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고 싶어하지 않으랴.
머리 긴 사두들과 꽃등불 파는 소녀, 히말라야 성지에서 막 돌아온 순례자의 무리, 사리로 얼굴을 가린 채 강물에 꽃을 뿌리는 코걸이 한 여인들...... 해롭지 않은 열기를 즐기는 꽃들아. '오이오이오이'하고 노래하는 새들아, 꿈들아, 축제의 밤들아, 멀어졌다가는 다시 다가오는 날들아, 언제가 되어야 그는 그대들과 다시 해후할 것인가.
새들이 다시 모래 언덕으로 날아왔다. 흰 날개들이 지상에 모두 내려앉을 때쯤, 그 힌두 노인이 물에 젖은 분홍색 목도리를 어깨에 걸치고 성큼성큼 강둑 위로 걸어 올라갔다.
도중에 노인은 문득 나를 향해 돌아서더니, 손을 흔들며 이렇게 소리치는 것이었다.
"피니시, 피니시(끝났어, 다 끝났어)!"
류시화시인의 책을 보고있으면 맘이 참 펀하더군요......
이책을 통해서 인생의 깊이를 다시한번 되짚네요...
어쩜 하루하루 부대껴사는 삶이 너무나 허무한것 같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