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소개]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
이 책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은 류시화 시인이 지난 10년 동안 열 차례에 걸쳐 인도 등지를 여행하면서 체험한 일화들을 모은 것입니다. 아래는 서문입니다.
날이 밝았으니 이제 여행을 떠나야 하리.
시간은 과거의 상념 속으로 사라지고
영원의 틈새를 바라본 새처럼 그대 길 떠나야 하리.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
그냥 저 세상 밖으로 걸어가리라.
한때는 불꽃 같은 삶과 바람 같은 죽음을 원했으니
새벽의 문 열고 여행길 나서는 자는 행복하여라.
아직 잠들지 않은 별 하나가 그대의 창백한 얼굴을 비추고
그대는 잠이 덜 깬 나무들 밑을 지나
지금 막 눈을 든 어린 뱀처럼 홀로 미명 속을 헤쳐 가야 하리.
이제 삶의 몽상을 끝낼 시간
날이 밝았으니, 불면의 베개를 머리맡에서 빼내야 하리.
오, 아침이여, 거짓에 잠든 세상 등 뒤로 하고
깃발 펄럭이는 영원의 땅으로 홀로 길 떠나는 아침이여.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자
혹은 충분히 사랑하기 위해 길 떠나는 자는 행복하여라.
그대의 영혼은 아직 투명하고
사랑함으로써 그것 때문에 상처입기를 두려워하지 않으리.
그대가 살아온 삶은 그대가 살지 않은 삶이니
이제 자기의 문에 이르기 위해 그대는
수많은 열리지 않는 문들을 두르려야 하리.
자기 자신과 만나기 위해 모든 이정표에게 길을 물어야 하리.
길은 또다른 길을 가리키고
세상의 나무 밑이 그대의 여인숙이 되리라.
별들이 구멍 뚫린 담요 속으로 그대를 들여다보리라.
그대는 잠들고 낯선 나라에서 모국어로 꿈을 꾸리라.
여행자를 위한 서시
1997년 여름 류시화
▣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 / 류시화 지음 / 도서출판 열림원 / 1997년 5월 10일 1판 1쇄 발행.
※ 참고사항 : 이 책의 출간 이후, 책의 분위기에 휩쓸려 무작정 배낭여행을 나선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인도를 비롯한) 해외 여행시의 위험 요소와 안전 문제에 대한 대비책 등 여행 전반에 관한 준비를 철저히 한 후에 행동으로 옮기시는 것이 현명할 것입니다.
◉ 내용 보기
[1] 빈자의 행복 (11~18쪽)
차루는 허풍쟁이였다. 걸핏하면 허풍을 떨었다. 그리고 말끝마다 "노 프라블럼!"을 외쳤다.
차루는 키가 작고 못생겼다. 그는 내가 묵고 있는 남인도 마드라스의 호텔 앞에서 아침마다 릭샤(바퀴 셋 달린 택시)를 받쳐놓고 손님을 기다렸다. 내가 호텔 문을 나서면 차루는 운전석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다가도 다른 릭샤꾼들을 제치고 재빨리 달려왔다. 그리고는 날 모시고 다니려고 이른 새벽부터 대기하고 있었다고 허풍을 떨었다.
처음 차루의 릭샤를 탔을 때 연신 기침을 해대는 것이 안돼 보여 약 사먹으라고 차비를 더 얹어준 적이 있었다. 그것이 화근이었다. 그날부터 차루는 아예 나를 자기 주인으로 모시기로 작정한 듯 어딜 가나 따라다녔다.
나는 약간 창피했다. 오리 궁둥이를 한 못생긴 차루가 아무데서나 "주인님. 주인님!" 하며 아는 체를 하는 데는 문제가 있었다. 나를 보기만 하면 차루는 목에 걸었던 지저분한 수건으로 릭샤 뒷좌석의 먼지를 털면서 어서 타라는 시늉을 했다. 근처 우체국에 가는 길이며, 걸어가도 충분한 거리라고 설명해도 차루는 막무가내였다. 그저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노 프라블럼. 써(아무 문제없어요. 선생님)!"
날마다 비싼 릭샤를 타고 다닐 만큼 돈이 많지 않다고 말하면, 그는 또 엉덩이까지 흔들며 외쳤다.
"노 프라블럼. 써!"
돈 같은 건 문제가 아니니 어서 타라는 것이었다. 차루는 정말로 인생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가진 거라곤 홑바지밖에 없으면서도 언제나 밝고 익살맞았다. 또 인도인 특유의 그 끈질김이란!
마침내 하는 수 없이 내가 릭샤에 올라타면 차루는 차창에 매단 고무나팔을 푸웅푸웅 울려대며 인파 가득한 거리로 내달렸다. 앞에서 거치적거리는 사람이 나타나면, 노인이든 예쁜 처녀든 차루에게 된통 욕을 얻어먹어야 했다.
한 번은 시내에 있는 나라다 사바 음악회관에 가던 중에 서류가방을 든 관리가 길을 비키지 않자, 차루는 또다시 푸웅푸웅 경적을 울리며 욕을 한 바가지 퍼부었다. 천한 릭샤 운전사에게 욕을 먹은 고급관리는 잔뜩 화가 났다. 그는 막을 새도 없이 차루의 왼쪽 뺨을 후려쳤다. 바라보고있던 나까지도 눈에서 불꽃이 튈 만큼 험악한 손찌검이었다.
차루는 천민이었다. 신분 차별 관습이 뿌리 박힌 인도 사회에서 차루는 아무 힘이 없었다. 그래서 관리의 뺨을 맞받아 칠 수도 없었다. 차루는 얼얼한 뺨을 어루만지기만 했다. 관리는 그것도 모자라 또 한 대 후려칠 기세였다.
마냥 구경만 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얼른 릭샤에서 뛰어내려 관리를 가로막고 힘껏 떠다밀었다. 외국인이 떠다밀자 뚱뚱한 관리는 중심을 잡지 못하고 엉겁결에 소똥 위로 자빠지고 말았다. 순식간에 인도인들이 몰려들었다.
그대로 있다간 사태가 불리했다. 나는 릭샤에 올라타며 차루에게 소리쳤다.
"찰로, 찰로!"
'찰로'는 빨리 내빼자는 뜻이다. 차루는 푸웅푸웅 고무나팔을 울리면서 바람처럼 릭샤를 내몰았다. 음악회관에 도착해서 보니 차루는 뺨에 벌겋게 손자국인 나 있었다. 걱정이 된 내가 괜찮으냐고 묻자 차루는 목소리도 낭랑하게 외쳤다.
"노 프라블럼, 써!"
음악회관에 앉아서 인도의 대표적인 현악기 시타르 연주를 듣고 있는데 마당에서 기다리고 있는 차루가 마음에 걸렸다. 욕을 한 건 잘못이지만 뺨을 때리다니. 차루는 몇 살이나 됐을까? 결혼은 했을까? 가족은 있을까? 차루에 대해 궁금한 게 많았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물어볼 수도 없었다. 안 그래도 이번 사건을 계기로 더욱 친근하게 굴 게 틀림없었다. 아마 이젠 친동생처럼 따라다니려고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연주회가 끝나서 나가보니 차루는 운전섯에 앉아서 모든 걸 잊고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차루에게, 저녁에 공항에 함께 갈 수 있느냐고 물었다. 차루는 깜짝 놀라며 오늘 떠나는냐고 했다. 그런게 아니라 내 친구들이 오늘 밤 인도에 도착할 예정이어서 마중을 나가야 한다고 설명하자 차루는 명랑하게 소리쳤다.
"당신의 친구라면 곧 내 친구인데 당연히 나가야죠. 노 프라블럼!"
그런데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 한 가지 있었다. 차루는 공항 주차장에 릭샤를 세워둘 수 없었다. 그곳은 다른 릭샤꾼들의 세력권이었던 것이다. 잘못하다간 또 얻어맞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차루는 그런 설명도 없이, 공항에서 1킬로미터 떨어진 길가 숲에다 릭샤를 숨겨 놓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이유를 물어도 대답하지 않았다. 차루는 나를 공항에 내려준 뒤 곧장 사라지더니 그 먼 거리에 릭샤를 감춰두고 맨발로 뛰어왔다.
비행기가 도착했으나 친구들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카레냄세 풍기는 구름떼 같은 인도인들 틈에서 목을 빼고 서 있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차루는 그 동안 다른 릭샤꾼들의 눈을 피해 대합실 밖 기둥 옆에 숨어 있었다. 수건으로 얼굴을 가린 채 빼꼼히 눈만 내놓고서 유리창 너머로 나를 바라보았다.
한 시간쯤 지났을 때였다. 바깥이 소란스러워 고개를 빼고 쳐다보니 차루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불길한 예감에 나는 서둘러 대합실 밖으로 뛰어나갔다. 아니나 다를까, 차루는 바닥에 넘어져 있고 입술에선 피가 흐르고 있었다.
차루의 주위로 웅성거리며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또 누구한테 얻어맞은 걸까. 나는 황급히 차루를 일으켜 세웠다. 그런데 알고 보니 차루는 기둥에 기대서 졸다가 앞으로 자빠지는 바람에 입술을 깬 것이었다. 어처구니없어 하는 나에게, 차루는 얼굴을 가렸던 수건으로 상처를 닦으며 소리쳤다.
"노 프라블럼, 써!"
마침내 내 친구들이 나타났다. 번개처럼 뛰어가 릭샤를 가져온 차루는 내 친구들을 얼싸안으며, 나의 둘도 없는 인도인 친구 행세를 하는 것이었다. 입술이 쿤타킨테처럼 부르튼 채로. 친구들은 내가 어쩌다가 이런 괴상한 인도 친구를 사귀게 됐나 하는 표정들이었다.
다음날 아침, 나는 차루에게 내 일행과 함께 남쪽 도시로 여행을 떠나려 하니 버스표를 사다 달라고 부탁했다. 인도는 버스표나 기차표를 구하기 힘들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예약을 해두는 것이 안전했다. 차루는 아무 걱정하지 말라고 큰소리쳤다. 버스표 살 돈을 주겠다고 해도 그만한 돈쯤은 자기가 갖고 있으니, 표를 사온 다음에 달라고 했다. 나중에 심부름 값까지 쳐서 두둑이 받을 심산인 것 같았다.
그러나 저녁때까지 호텔로 버스표를 갖고 오기로 한 차루는 밤 열두시가 되어도 나타나지 않았다. 우리는 할 수 없이 이른 아침에 버스 정류장으로 가서 웃돈을 얹어주고서야 겨우 버스에 올라 탈 수 있었다.
근처 도시에 있는 스리 오로빈도 명상센터에 다녀온 이튿날, 나는 거리에서 차루와 마주쳤다. 차루는 릭샤에서 뛰어내리며 반갑게 아는 체를 했다. 나는 화가 나서 버스표에 대해 따져 물었다. 차루는 놀라는 시늉을 하며 또 허풍을 떨었다.
"아아, 맞아요. 버스표가 있었지요! 그런데 그만 길이 막혀서 늦고 말았지 뭡니까!"
말도 안 되는 변명이었다. 무슨 길이 막혔느냐고 따지자 차루는 얼른 고백했다.
"아아, 맞아요. 사실은 깜빡 잊고 말았어요."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이런 친구를 믿고 버스표 예약을 맡긴 내 자신이 한심했다. 내가 화를 내며 앞으로 걸어가자 차루는 뒤에 따라오며 여행은 잘 다녀왔느냐고 물었다. 나는 여전히 무뚝뚝한 얼굴로 그렇다고 짧게 대답했다.
그러자 차루가 내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왜 화를 내시는 거죠? 잘 다녀왔으면 그걸로 노 프라블럼 아닌가요? 이미 지나간 일인데 그런 것 때문에 화를 낸다면 어리석은 일 아닌가요?"
이제는 그 놈의 '노 프라블럼' 소리도 지겨웠다. 나는 냉정하게 차루를 밀쳐냈다. 그 순간 차루가 또 말하는 것이었다.
"모든 것은 당신 자신의 업이에요. 이미 수천 년 전부터 정해져 있는 일인 걸 내가 어쩌란 말인가요. 어쨌든 현실의 결과를 받아들여야지요."
그렇게 말하는 순간, 차루는 한낱 릭샤 운전사가 아니었다. 인생의 문제를 초월한 성자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인도 사회의 가장 밑바닥 계층에서 어느덧 깨달음을 얻은 힌두 명상가로 변신해 있었다.
희랍의 철학자 제논이 상인이었던 시절의 일이다. 그의 집에는 특별한 노예가 한 명 있었다. 어느 날 제논이 화가 나서 노예의 뺨을 때리자 노예는 평온한 목소리로 제논에게 말했다고 한다.
"저는 아득히 먼 옛날부터 이 순간 주인님에게 뺨을 맞도록 되어 있었고, 주인님은 또 제 뺨을 때리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 두 사람은 정해진 운명에 따라 충실히 제 역할을 수행했을 뿐입니다."
제논은 훗날 스토아 학파의 대철학자가 되었는데, 인도인으로 짐작되는 이 노예에게 영햐을 받은 듯 '어떤 상황에서도 감정에 흔들림 없는 현실 수용'이 그의 주된 사상이었다.
한편 로마 철학자 세네카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갖고 있는 것이 당신에게 불만스럽게 생각된다면, 세계를 소유하더라도 당신은 불행할 것이다."
세네카든, 제논의 노예든, 또는 차루든, 이들이한결같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이다. 너의 소원이 이뤄지지 않았다고 불평하지 말고 오히려 삶이 일어나는 대로 받아들여라. 그러면 넌 어떤 상황에서도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차루는 어디서 그런 현실 수용의 지혜를 배웠을까. 여러 명상센터를 수시로 드나들면서도 내가 얻어 갖지 못한 그것을 그는 어떻게 체득했을까. 나로선 불가해한 일이었다.
마드라스를 떠나는 날 아침, 마지막으로 차루를 만났다. 작별 인사도 할 겸, 그 동안 타고 다닌 릭샤 값을 지불하기 위해서였다. 그러자 차루는 또 손을 흔들며 허풍을 떨었다.
"돈은 주고 싶은 대로 주세요. 전 아무 문제없습니다."
내가 일부러 정색을 하면서, 그럼 1루피(30원)만 줘도 되겠느냐고 묻자 차루는 외쳤다.
"노 프라블럼!"
그러면서 차루는 당당하게 덧붙였다. 1루피만 줘서 내가 행복하다면 그렇게 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이미 자기의 친구이니까, 자기한테 중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내 행복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잠시만의 행복이 아니라 돈을 준 내 자신이 오래도록 행복할 수 있을 만큼 돈을 달라고 했다.
영리한 차루, 얄미운 차루, 못난 차루······. 마드라스를 떠난 뒤에도 오랫동안 차루의 인상이 지워지지 않았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생을 살면서도 "노프라블럼!"을 외치며, 푸웅푸웅 고무나팔을 울리며 세상 속으로 달려가는 차루! 많은 걸 갖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집착과 소유를 벗어 던지지 못하는 내게 그는 잊지 못할 훌륭한 스승이었다.
[2] 480원 어치의 축복 (31~39쪽)
누구나 한번쯤 아침에 눈을 떳을 때 어떤 이유없는 허무감과 슬픔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마치 어는 전생에선가 무척이나 힘든 삶을 살았던 것처럼 원인 모를 슬픔이 밀려올 때가 있다. 마치 어느 전생에선가 무척이나 힘든 삶을 살았던 것처럼 원인 모를 슬픔이 밀려올 때가 있다.
그 무렵의 내가 그랬다. 나는 인생의 허무감에 젖은 채로 버스를 타고 북인도 대륙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현생의 슬픔만이 아니라 먼 전생으로부터 전해지는 어떤 슬픔이 나를 길거리에서 방황하게 만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탄 버스 위로 성자 한 명이 오렌지색 누더기를 걸치고 올라탔다. 이마에는 노란색, 붉은색, 흰색의 문양이 그려져 있고 발꿈치까지 내려올 성싶은 긴 머리는 둘둘 말려 머리 꼭지에 얹혀져 있었다.
성자는 버스에 타자마자 운전사와 심한 입씨름이 붙었다. 말이 빨라서 도저히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눈치를 보니 성자가 차비가 없는 모양이었다. 성자는 설령 돈이 있다 해도 낼 수 없다는 당당한 태도였다.
인도 땅에서 사두(힌두 탁발승)들은 지난 수십 년 동안 기차든 버스든 공짜로 타는 걸 자랑으로 여겨왔다. 신과 진리를 추구하는 일에 자신들의 생을 바치고 있으니 차비 따위는 그냥 넘어갈 수도 있다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이제 인도 사회 역시 큰 변화를 맞이 하고 있었다. 신세대인 20대 버스 운전사는 성자든 시바 신이든 요금을 내지 않으면 절대로 버스에 태워줄 수 없다는 완강한 자세였다.
시대의 변화를 절감한 늙은 성자는 할 수 없다는 듯이 어깨에 멘 보따리 안을 뒤적여 칠이 벗겨진 손거울을 꺼냈다. 성자는 그것을 차비 대신 운전사에게 내밀었다. 아침마다 이마를 비워보며 신의 문양을 그리는 데 사용하는, 성자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손거울이었다.
운전사가 쓸모도 없는 그런 물건을 받을 리 없었다. 오히려 화만 돋우었을 뿐이었다. 젊은 운전사는 더욱더 큰소리로 성자를 윽박질렀다. 성자는 손거울을 도로 집어넣고 이번에는 때묻은 소라고동을 내밀었다. 이른 새벽 갠지스 강가에서 대지의 어머니인 강을 향해 뿌웅뿌웅 문안 인사를 올리는 데 필요한, 성자의 필수품이었다.
운전사는 마침내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성자가 자기를 놀린다고 생각했던지 운전석에서 일어나 성자를 버스 밖으로 떠다 밀려고까지 했다.
그 순간 성자는 사람들의 동정심을 구하기 위해 버스 안을 둘러보았다. 승객들은 운전사의 비위를 건드릴 수도 없는 노릇이라서 모른 척하고 앉아 있었다. 그 순간 성자는 문득 인도인들 틈바구니에 장발을 하고 앉아 있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나 역시 얼른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지만 이미 그에게 발각된 뒤였다. 성자는 운전사에게 나를 손짓해 보이더니 잠시 기다리라고 하고선 성큼성큼 내게로 걸어왔다.
나는 모른 체하고 창밖을 내다보고 잇었다. 남의 일에 말려들 기분이 아니었다. 하지만 내 기분은 아랑곳하지 않고 성자는 손가락으로 어깨를 툭툭 쳤다. 마지못해 쳐다보자 그는 마치 신의 메시지를 전하기라도 하는 사람처럼 당당하게 말했다.
"나는 그대를 만나려고 이 버스에 탔다. 그러니 그대가 내 대신 차비를 무는 것이 당연한 일이로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성자의 복장을 한 사람이 차비 몇 푼을 빼앗으려고 거짓말을 하다니! 나는 한심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성자는 포기하지 않았다. 또다시 나뭇가지 같은 손가락으로 내 어깨를 두들기는 것이었다. 순간적으로 나는 몹시 화가 났다. 슬픔은 곧잘 사람을 외롭게 만들고, 외로움은 인간을 공격적으로 만든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성자를 향해 소리쳤다.
"난 당신을 만나자고 한 적이 없어요. 그러니 허튼 소리 그만두고 저리 가요. 남의 돈으로 버스를 타려거든 차라리 걸어서 다니라구요."
내 목소리가 하도 커서 버스 안의 사람들이 다 쳐다볼 정도였다. 나는 기분도 좋지 않은 판에 대판 싸움이라도 벌일 기세였다. 성자는 알아듣기도 힘든 인도식 영어로 즉각 맞받아쳤다.
"그것이 왜 그대의 돈이란 말인가? 그대는 지금 그까짓 5루피를 갖고 자신의 소유라고 주장하는 것인가? 그대는 그것이 자기가 잠시 보관하고 있는 돈이라는 걸 모른단 말인가?"
나는 말문이 막혔다. 인도를 여행하면서 이런 일을 당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언젠가 뭄바이(봄베이)에선 한 남자가 내 가방을 뒤져 물건을 갖고 가버린 적도 있었다. 그때도 내가 왜 남의 물건을 허락 없이 가져가느냐고 항의하자 그 남자는 당당하게 내 어리석음을 훈계하는 것이었다.
"당신은 무슨 이유로 이것이 당신의 소유라고 생각하는가? 당신은 잠시 이것을 갖고 있을 뿐이다. 주인이 모자를 벗어 잠시 벽에 걸어 놓는다고 해서 그 모자가 벽의 소유란 말인가?"
인도인들의 막힘없는 논리는 논리학의 할아버지인 아리스토텔레스가 와도 당해낼 재간이 없다. 성자가 과연 나를 만나기 위해 버스를 탔는가의 사실 여부를 놓고 토론을 벌인다면 내가 질 게 뻔했다. 힌두교의 인연론은 그 교리가 성립되는 데만 1천 년의 세월이 걸렸다. 그러니 그 유창한 논리를 내가 무슨 수로 당해낼 것인가.
제풀에 싸움을 포기한 나는 차장에게 5루피를 던져주었다. 성자는 기분이 좋아서 고개를 끄덕이고, 사태는 해결되었다. 버스는 이윽고 인도풍의 아열대 태양광선 속으로 출발했다.
나는 그때 히말라야 산중의 데라둔으로 가는 중이었다. 하리드와르, 데라둔, 무쑤리와 같은 마을들은 내가 번역한 바바 하리 다스의 소설(성자가 된 청소부)에 등장하는 지명이다. 그 책을 번역하면서 언젠가 작품의 무대가 된 그 지방들을 여행해보리라고 마음먹었었다.
버스가 출발하자 성자는 당연한 듯이 내 옆에 앉은 남자를 밀쳐내고 그 자리에 앉았다. 머리는 지저분하기 짝이 없고, 하도 오래 이를 닦지 않아서 고약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버스에서 내릴 때까지 꼼짝없이 고역을 치를 판이었다.
나는 냄새를 피해 얼굴을 외면했다. 그러는 내게 성자가 대뜸 물었다.
"그대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중인가?"
나는 무심코 데라둔에 간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성자는 엄숙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내가 버스를 잘못 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히 데라둔행 버스임을 확인하고 탔는데 뭔가 잘못된 모양이었다.
버스 행선지를 다시 확인하려고 자리에서 일어서려는데 성자가 얼른 나를 끌어 앉히며 말했다.
"그대는 표면적으로 볼 때 지금 데라둔으로 가고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그렇지 않아. 데라둔은 공간 속의 한 지점일 뿐이지. 지금 그대가 가고 있는 시간 속의 지점은 그곳이 아닌 다른 곳이야."
그렇다면 그곳이 어디냐고, 성자는 사뭇 철학적인 어조로 스스로 묻고 스스로 대답했다. 그곳은 다름 아닌 *신*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말했다.
"그대가 어디로 가고 있든, 사실 그대는 신을 향해 가고 있는 중이야. 그대가 데라둔으로 가든 히말라야로 가든 실제로 그대는 신에게로 조금씩 다가가고 있을 뿐이지. 그대는 신에게 이르기 위해 수많은 생을 윤회하고 있어."
그러면서 성자는 엄숙히 결론을 내렸다.
"신에게로 향하는 그대의 여정을 성공리에 마칠 수 있도록 내가 그대 앞에 현신한 것이라네."
그리고 사실은 자기가 전생에서부터 나를 기다려 왔노라고, 성자는 조금도 망설임 없이 선언했다. 그런데 이렇게 버스 안에서 만났으니 얼마나 감동적이냐는 것이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전생에 나는 그의 첼라(제자)였고 그는 나의 구루(영적 스승)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수행중에 내가 도망쳐서 어디로 갔나 했더니 한 생이 지난 이제서야 버스 안에서 만났다는 것이었다. 인연의 고리는 너무도 단단해서 누구도 그것으로부터 달아날 수 없노라고 성자는 단호히 못을 박았다.
성자가 설명을 하는 동안 버스에 탄 사람들 모두가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고개를 빼고 우리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바로 앞좌석에 앉은 얼굴 시커먼 남자는 아예 우리를 향해 돌아앉아 재밌어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그 남자는 어찌된 영문인지 치아가 온통 붉은색으로 변해 있었다. 아마도 인도인들이 즐기는 판(마약 성분의 씹는 담배)을 너무 많이 씹어서 그렇게 된 모양이었다.
전생에 대해 확인할 길이 없지만, 성자의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나는 잠자코 그의 주장을 들어주었다. 이때 버스 운전사가 뭐라고 떠들자 승객들이 와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아마 날 갖고 농담을 한 모양이었다.
성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또다시 내게 물었다.
"자, 그대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중인가?"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잠시 망설였다. 아까처럼 데라둔으로 가고 있는 중이라고 대답하면 어리석은 자가 될 것이고, 그렇다고 금방 앵무새처럼 *신에게로 가는 중*이라고 따라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내가 입을 다물고 있는 성자는 다시금 어디로 가고 있는 중이냐고 다그쳐 물었다. 나는 할 수 없이 자신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신에게로 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성자는 또다시 엄숙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것 역시 틀린 대답이라는 것이었다. 그가 말했다.
"표면적으로는 그대가 신을 향해 가고 있는 중이지만, 신은 시공간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야. 그러니 그대가 어디를 향해 간다고 해서 신을 만날 수 있는 게 아니지."
마침내 나는 그에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신을 만날 수 있죠?"
성자는 이 질문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한 손을 들어 허공을 찌르며 짧게 말했다.
"내 축복을 통해서지!"
당당하고 확신에 찬 주장이었다. 내가 다시 물었다.
"그럼 지금 제게 축복을 내려주실 수 있나요?"
성자는 역시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과장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물론이야. 하지만 돈을 내야돼!"
승객들은 마침내 이 희한한 구경거리의 결말 부분에 이르렀다는 걸 직감했는지 다들 침을 삼키며 나를 지켜보았다. 저 어리숙한 외국인 여행자가 노련한 성자에게 어떻게 당하나 보겠다는 표정들이었다.
내가 말했다.
"그럼 돈을 낼 테니 신을 만날 수 있도록 지금 당장 축복을 내려 주시죠."
성자는 자신있게 말했다.
"그거야 어렵지 않지!"
나는 주머니에서 1루피를 꺼내 성자에게 바쳤다. 성자는 자기 손바닥에 놓인 백동전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금액이 작아서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가 말했다.
"물론, 돈의 많고 적음으로 신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축복을 내리는 내가 신명이 나도록 도와주는 것은 그대의 의무라고 할 수 있겠지. 안 그런가?"
나는 할 수 없이 5루피를 더 얹어주었다. 그래도 성자는 신명이 나는 표정이 아니었다. 10루피를 더 바치자 마침내 성자의 얼굴에 만족스런 미소가 번졌다.
그리하여 북인도의 산악지대를 통과하는 버스 안에서 나는 16루피(480원) 어치의 축복을 성자로부터 받았다. 성자는 노란색과 붉은색 물감을 꺼내 내 이마에 무늬를 그리고 만트라(신성한 주문)를 읊어대기도 하면서 "하리 옴! 옴 나마 시바야!"를 소리도 낭랑하게 외쳤다. 그는 이번 생에서 내가 틀림없이 신에게 다가갈 수 있도록 길고 유창한 축복의 말들을 내 머리꼭지 위에다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의식이 끝나자 앞자리에 앉은 이빨 붉은 남자를 선두로 버스에 탄 사람들 모두가 일제히 박수를 쳤다. 히말라야 산중을 달리는 버스 안에서 난데없이 울려 퍼진 박수소리는 성당과 교회에서 행하는 어떤 영세식과 세례식 때보다도 더 열렬한 축하였다.
성자의 축복을 받고 나니 내 자신이 신에게로 성큼 다가섰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인생의 절망과 슬픔에젖었던 한 여행자는 빈털터리 성자의 유머와 재치 덕분에 마음이 한결 밝고 여유로워질 수 있었다. 그 밝고 여유로운 세계가 내게는 곧 신의 자리였다.
성자가 내려준 그날의 축복은 까닭 없는 허무감에 흔들리던 한 젊은이의 영혼을 가단히 치유해주었다. 데라둔까지 가는, 아니 신에게로 가는 버스 여행은 그렇게 두 시간이 걸렸다. 내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3] 어느 문명인의 실종 (40~46쪽)
처음으로 북인도 대륙을 여행할 무렵,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서 며칠 동안 식사다운 식사를 하지 못했다. 음식마다 뿌려진 강렬한 향료는 식욕을 달아나게 했고, 싸구려 식당의 불결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배가 고파 식당으로 들어갔다가도 몇 숟가락 쑤석거리다 마는게 고작이었다.
게다가 식당 주인은 바닥을 닦던 걸레로 테이블도 닦고 그릇까지 닦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매번 그걸 나무랄 수도 없었다. 그랬다간 또 무슨 훈계를 들을지 모를 일이었다. 인도에서 불교를 전공하던 어떤 한국인 교수가 하인에게 행주와 걸레를 구분해서 쓰라고 충고했더니, 그 인도인 하인은 더러움과 깨끗함을 차별하는 마음도 버리지 못하면서 어떻게 불교를 전공한다고 할 수 있느냐?"고 교수에게 되레 큰소릴 쳤다고 한다.
또 인도인들은 대부분 손으로 밥을 먹는다. 왜 스푼을 사용하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먹느냐고 했다가 나는 된통 설교를 들어야만 했다. 누구의 입에 들어갔었는지도 모르는 스푼으로 먹는 것보다 자기 손으로 먹는 게 훨씬 위생적이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기들은 손가락으로 음식의 맛을 아는 능력을 지녔다고 주장했다.
입맛이 떨어진 나는 물로만 배를 채웠다. 하지만 열흘쯤 지나자 배가 고파 견딜 수가 없었다. 이대로 가다간 허기에 지쳐 쓰러질 판이었다. 뭐든지 먹어야만 했다. 이튿날 아침 일찍 호텔을 나선 나는 비교적 깨끗한 식당으로 들어가 맛을 따지지 않고 이것저것 시켜 먹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여행을 계속하는 것조차 불가능했을 상황이었다.
그것이 화근이었다. 아침을 먹고 나서 장거리 시외버스에 올라 탔는데, 당장 배탈이 나고 만 것이다.
버스는 온갖 종류의 인도인들을 빼곡이 싣고 열여덟 시간 거리에 있는 비하르 지방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드넓은 들판지대를 두 시간쯤 달렸을 때, 아랫배가 쌀쌀 아프더니 급기야 장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자극적인 인도 음식을 내 소화기관이 견디지 못하고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달리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도중에 버스를 내릴 수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그 동안 배운 지식을 동원해 손가락과 손바닥을 마구 지압했다. 그리고 재빨리 정로환 몇 알을 삼켰다. 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상태는 더 나빠져 아랫배가 부글거리고, 금방이라도 바지에 설사를 할 것만 같았다. 나는 그야말로 얼굴이 사색이 되어 몸을 뒤틀었다.
그렇게 반 시간쯤 참았을 때 나는 마침내 인내의 한계에 이르렀다. 더 이상 참다가는 더 걷접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질 게 분명했다. 나는 손을 번쩍 들고 운전사를 향해 소리쳤다.
"잠깐 차를 세워주세요. 배탈이 나서 견딜 수가 없어요. 얼른요."
그 순간, 평화롭게 오전 햇살을 받으며 북인도 들판지대를 달리던 낡은 시외버스는 그 안에 탄 유일한 외국인 여행자 때문에 잠시 소동이 일었다. 내가 쥐어짜는 목소리로 버스를 세우라고 요구하자 차 안에 탄 인도인들 시선이 전부 내게로 쏠렸다. 사리 입은 여인, 흰 두건 쓴 시크교 노인, 이마에 점을 찍은 처녀 할 것없이 모두가 나를 쳐다보았다. 남의 자리에 끼여앉아 옆사람의 호주머니를 훔쳐보던 소매치기까지도 나한테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창피한게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다시 한 번 애원하듯이 소리쳤다.
"빨리 차를 세워요! 잠깐만 내렸다 탑시다!"
운전사는 영어를 못 알아듣는지 조금 더 달리다가 한 인도인 남자의 통역을 받고는 끼익 하고 버스를 세웠다. 하도 급작스럽게 차를 세워서 승객들 모두가 와락 앞으로 쏠렸다가 겨우 중심을 잡았다.
나는 황금히 문으로 달려갔다. 그때 일말의 불안감이 밀려왔다. 내가 내린 사이에 버스가 떠나버리기라도 하면 큰 낭패였다. 마을 조차 없는 허허벌판의 무인지대에 혼자 남겨질 순 없는 일이었다. 나는 운전사에게 내가 돌아올 때까지 떠나지 말고 기다릴 것을 강력히 지시했다. 그래도 미심쩍어서 나는 버스를 내리다 말고 도로 올라가 배낭을 들고 내렸다.
버스에서 뛰어내린 나는 배낭을 들쳐안고 무의식적으로 도로옆 들판을 향해 10미터 달려갔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북인도의 들판지대는 수평에 가까운 황무지가 대부분이다. 언덕 하나 없는 평지에다 나무들조차 구경하기 어렵다. 공교롭게도 내가 버스에서 내린 지점이 바로 그런 지대였다.
나는 달려가다 말고 주위를 살폈다. 몸을 가릴 만한 장소가 한 군데도 눈에 띄지 않았다. 바위나 언덕 같은 것이라도 있으면 그 뒤로 돌아가 일을 볼 텐데 사방은 그저 툭 트인 황무지일 뿐이었다. 그렇다고 문명국가에서 온 내가 아무데서나 바지를 내리고 일을 치를 순 없었다.
나는 당황한 나머지 고개를 돌려 버스를 쳐다보았다. 차 안에 탄 인도인들 모두가 일제히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한참 무료하던 판에 이게 웬 구경거린가 하는 표정들이었다.
나는 어색함을 감추기 위해 다시 10여 미터를 달려갔다. 그래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전방에 가냘픈 나무 한 그루가 외롭게 서있는 것 말고는 내 한 몸 가릴 만한 은폐물이 천지간에 없었다. 인도인들은 저 친구가 왜 저렇게 허둥대는지 이해가 안간다는 듯 저마다 차창에 얼굴을 대고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갑자기 광야에 홀로 선 외로운 문명인이 되고 말았다. 인도인들은 아침마다 들판이나 철둑길 같은 곳으로 몰려가 일을 보지만, 나마저 멀건 대낮에 아무데서나 엉덩이를 내보일 순 없었다. 그렇다고 아주 멀리 지평선 너머로 거위처럼 달려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는 사이 배탈은 더욱 심해져 조금만 더 지체하다간 영락없이 바지를 적실 판이었다. 나는 너무도 당황스럽고 황당해서 영혼이 몸부림칠 것만 같았다.
마침내 나는 배낭을 끌어안고 스무 걸음 정도를 더 뛰어가 전방에 외롭게 서 있는 나무 뒤로 돌아갔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나무라고 할 수도 없었다. 굵기가 팔뚝 정도에 불과해서 내 몸을 전혀 가려 주지도 못했다. 그러자니 더욱 우스운 꼴이 되고 말았다. 덩치가 크고 머리는 장발을 한 사람이 지팡이만한 나무 뒤에 몸을 숨긴 셈이 되었다. 바지를 내리고 그 나무 뒤에 쪼그리고 앉아 일을 보기 시작했지만, 버스에 탄 인도인들은 볼 것을 다 보고 있었다.
비록 지팡이만한 나무일지라도 무언가에 의지할 수 있어서 그나마 안심이었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완전히 정신적 공황에 빠질 뻔했다. 인도인들은 나를 낱낱이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애써 나무둥치에 눈을 갖다대고 그들이 보이지 않는 척했다.
어쨌든 위기는 면했다. 바지에 실례를 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었다. 볼일을 마친 나는 잃어버린 권위를 되찾기라도 하려는 듯 어깨에 힘을 주고 천천히 버스로 돌아갔다. 그리고 도중에 괜히 돌멩이 하나를 집어들어 멀리 던지는 여유까지 부려 보였다. 인도인들은 내 마음속을 다 간파하고 있다는 듯, 저 친구가 정말 왜 저러나 하는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북인도의 초가을 아침 햇살은 지친 영혼을 위로하는 부드러운 힘을 갖고 있다. 먹을 것이 별로 없는 인도인들은 저 아열대의 태양광선을 먹고 사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내가 올라타자 버스는 서둘러 먼지르 날리며 출발했다. 목적지 고락푸르까지는 먼 여정이었다.
또다시 배탈이 날 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한결 속이 편안해 졌다. 좌석으로 돌아온 나는 느긋하게 기대앉아 옆자리 승객들에게 들으라는 듯이 말했다.
"인도인들은 왜 화장실을 이용하지 않는지 모르겠어요. 들판이나 철둑길이나 강변에 마구 볼일을 보니 더럽기 짝이 없잖아요. 전염병의 원인이 될 수도 있구요. 화장실을 더 많이 지으면 한결 깨끗한 나라가 되지 않을까요?"
그러자 건너편에 앉은 50대 남자가 내 말을 받았다.
"자연 속에서 자연적인 일을 처리하는데 뭐가 나쁘다는 겁니까? 왜 당신들 외국인들은 성냥갑만한 공간 속에 숨어 냄새를 맡아가며 똥 위에 똥을 누고 있지요? 우린 아침마다 대자연 속에 앉아 바람과 구름을 바라보며 볼일을 봅니다. 그것이 우리에겐 최고의 명상이지요."
다른 남자가 말을 받았다.
"그래요. 자연스러움을 혐오하고 인위적인 것들을 추종하는 세상이 됐어요. 우리처럼 물로 닦지 않고 화장지를 사용해야 문명생활인 것처럼 생각하지만, 어디 정말로 그런가요. 강은 더 더러워졌고, 나무들은 더 없어졌지요."
그 옆의 남자도 한탄을 했다.
"그 결과 세상은 점점 위선적이 되어버렸어요. 명상적인 생활이 무엇인지도 모그구요. 무엇으로든 자신을 가려야만 문명인이라고 생각하게 됐지요."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의 말을 조용히 경청하고 있는 도리밖에 없었다. 자연스런 볼일을 보는데도 지팡이만한 어린 나무에 몸을 가리려고 허둥대던 나 자신이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그 와중에도 배낭을 잃어버릴까봐 잔뜩 끌어안고서....
버스는 창피함으로 얼굴이 붉어진 한 외국인 여행자와 묵묵히 창밖을 응시하는 사리 입은 여인, 흰 두건 쓴 시크교 노인, 이마에 점을 찍은 처녀, 그리고 또다시 옆사람의 호주머니를 훔쳐보는 손이 시커먼 소매치기 등을 싣고 광활한 북인도 대륙을 달려갔다. 나를 숨겨줄 아무런 은폐물도 없는 들판지대가 야속하긴 했지만, 한편으론 저 따사로운 평원의 햇살과 툭 트인 바람 속에서 내 온 존재를 마음껏 드러낸 채로 평생을 살아가고 싶었다.
[4] 피리 부는 노인 (111~115쪽)
"집에는 아이들이 다섯이나 있습니다. 먹을 거는 없고, 아내는 작년에 죽었지요."
피리 하나만 팔아달라고 통사정을 하면서 노인은 가정 사정을 늘어놓았다. 어딜 가나 듣는 애기였다. 워낙 인도의 피리 음악을 좋아하는 나이기에 잠깐 기웃거렸을 뿐이지 사실 그가 가진 형편없는 대나무 피리들을 살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는 내가 관심을 보이자 필사적으로 달라붙었다.
"훌륭한 물건입니다. 인도의 어딜 가도 이런 진짜배기 피리들을 구하긴 어렵지요. 싸게 해드릴 테니 제 사정 좀 봐주세요. 막내아이가 열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고 있답니다. "
나는 그가 하는 거짓말을 다 알고 있다는 듯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물었다.
"집세도 못 내서 쫓겨났겠군요."
그러자 노인은 깜짝 놀라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아니, 어떻게 그걸 아십니까? 우리 식구는 완전히 거리에 나앉았답니다. 그러니 적선하는 셈치고 하나만 팔아 주세요."
내가 다시 말했다.
"물론 1주일 동안 한 개도 못 팔았겠죠?"
노인은 말했다.
"맞습니다. 사실 이 피리들이 좋은 것이긴 해도 누가 사줘야 말이죠. 솔직히 말해 당신처럼 히피 같은 사람들이 아니면 누가 인도 피리 따위를 사려고 하겠습니까?"
노인은 말을 마치고 나서 내 환심을 사려고 피리 하나를 꺼내더니 휘엉청 불어제끼기 시작했다. 피리 장사를 오래 한 때문이지 피리 솜씨는 더없이 훌륭했다. 더구나 갠지스 강의 낙조를 배경으로 허공에 솟구치는 피리 곡조를 들으니 감동이 더했다. 피리 한 개를 팔려고 상투적인 거짓말을 하는 것이 틀림없긴 했으나, 피리를 부는 모습은 더없이 진지하고 감동적이었다.
나는 그동안 인도 여행 때마다 피리 한두 자루를 꼭 사들고 돌아오곤 했었다. 하지만 막상 사 갖고 온 피리들은 번번이 너무 형편없어서 제대로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파는 사람만 멋들어진 곡조를 낼 수 있을 뿐 나 같은 아마추어는 흉내내기도 어려웠다.
나는 또다시 쓸모없는 피리를 사고 싶지 않아서 노인에게 10루피(300원) 정도 적선하고 자라를 뜰 생각이었다. 그런데 주머니에서 10루피짜기를 꺼낸다는 것이 그만 덜렁 1백 루피짜리 종이돈이 나오고 말았다. 내가 아차하는 사이에 1백 루피는 노인의 재빠른 손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노인은 종이돈을 꼭 움켜쥔 손을 합장을 하고서 머리가 땅에 닿도록 절을 했다.
"아 이런 고마우시 데가! 신께서 틀림없이 당신을 기억하시 겁니다. 나 또한 영원히 당신을 잊지 않겠습니다."
그리고는 연신 합장한 손을 이마 위로 가져가는 것이었다. 이미 때는 늦어서 돌로 달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나는 맥없이 1백 루피를 빼앗긴 터라 속이 쓰렸지만 내색할 수도 없고 해서 억지로 자비스런 미소를 지으며 돌아섰다. 더 손해를 보기 전에 자리를 뜨는 게 상책이었다.
노인은 몇 걸음 더 쫓아오며 감사 표시를 하다가 내가 그만 됐다고 손짓을 하며마지막으로 합장을 하고서 작별의 손을 흔들었다. 노인으로선 뜻밖에 횡재를 한 셈이었다.
게스트 하우스로 돌아온 나는 할 일도 없고 해서 일찌감치 잠이 들었다. 그리고 새벽녘이 됐는데, 난데없이 피리소리 하나가 내 잠 속을 파고 들었다. 나는 아직 잠이 덜 깬 의식으로, 이 피리소리가 꿈속에서 들 리는 건지 창밖에서 들 리는 건지 몰라 한참을 그냥 침대 위에 엎드려 있었다.
그것은 창밖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눈을 부비며 창문을 열자 베란다 밑에 어제의 그 노인이 피리를 불며 서 있었다. 나를 보더니 그는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얼른 또다시 피리를 불기 시작했다. 가락이 긴, 아침에 듣는 인도 전통의 라가 곡이었다.
나는 순간 기가 막혀서 창문을 도로 닫았다. 어제 1백 루피를 빼앗아가더니 이제는 이른 아침부터 찾아와서 흥정을 붙이고 있었다. 그래서는 금방 쪼개져 버릴 피리를 떠넘기고 또다시 거금을 우려낼 계획이었다. 나는 고약한 노인네 때문에 잠이 확 달아나 버렸다.
창문을 닫은 뒤에도 피리소리는 멎지 않았다. 하는 수작은 미워도 피리 부는 솜씨는 역시 보통이 아니었다. 나는 조용히 타일러서 보낼 생각으로 주섬주섬 옷을 입고 밖으로 나왔다. 노인은 합장을 하며 내게 아침 인사를 했다. 나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근엄한 표정을 말했다.
"이보시오. 어제 그만큼 돈을 줬으면 됐지 왜 또 와서 이러는 거요? 난 분명히 말하지만 피리를 살 생각이 없어요. 그러니 어서 가시오."
그러자 노인이 말했다.
"아닙니다. 그게 아니에요."
나는 더 엄숙하게 소리쳤다.
"아니긴 뭐가 아녜요? 어서 가세요. 더 이상 내게서 뭘 뜯어낼 생각일랑 하지 말아요."
노인이 말했다.
"그게 아닙니다. 난 당신이 이곳에 머무는 동안 아침마다 당신의 방 앞에 와서 피리를 불어주기로 했습니다. 당신이 내게 도움을 주었으니까요. 난 그것 말고는 당신한테 해줄 것이 없거든요."
노인의 진지한 표정을 보고서 순간 난 내가 큰 실수를 했음을 깨달았다. 노인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그리고 돈을 더 우려내려고 찾아온 것도 아니었다. 그는 단순히 내가 준 돈에 고마움을 느껴 뭔가 보답을 하려고 찾아온 것이었다.
노인의 말은 진심이었다. 그것이 곧 밝혀졌다. 그는 내가 그 갠지스 강가에 머무는 닷새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아침마다 내 방 앞에 와서 필릴리 필릴리 피리를 불었다. 피리소리에 잠이 깨어 창문을 열면 미명을 헤치고 갠지스 강 위로 오렌지색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노인이 불어주는 피리곡 때문에 나는 날마다 새롭고, 뭔가 다른 하루를 맞이할 수 있었다.
마음이 내키지도 않은 상태에서 1백 루피,약 3천 원 정도를 적선한 덕분에 나는 뜻하지 않은 선물을 받았다. 노인은 내게 작은 베풂에도 보답하는 자세를 가르쳤고, 가난하지만 아직은 부유함을 잃지 않은 마음을 전해주었다.
그 노인 덕분에 나는 지금도 잘난 체하며 말한다. 나처럼 인도여행을 멋지게 한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고. 어떤 국가 원수가 인도를 방문했을 때 과연 아침마다 누군가가 와서 환상적인 피리소리로 잠을 깨워 주었겠느냐고. 내가 알기로 인도 역사상 그런 일은 한번도 없었다.
[5] 화장지와 기차와 행복 (154~159쪽)
나는 인도의 뭄바이 거리에 서 있었다. 10월이었지만 날은 여전히 무더웠다. 나는 공중수도에서 얼굴을 닦기 위해 멈춰 섰다. 인도는 더운 나라라서 도심의 거리에는 공중수도가 흔히 눈에 띈다. 나는 배낭을 옆에다 내려놓고 수도꼭지를 틀려고 몸을 숙였다.
그때였다. 한 인도인 남자가 내 쪽으로 걸어오더니 아무 말도 없이 내 배낭을 뒤적이는 것이었다. 나는 놀라서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내 배낭 안에서 두루마리 화장지를 꺼내더니 한 손에다 마구 휘감아 가져가는 것이었다. 화장지의 주인인 내 존재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행동이었다.
갑자기 당한 일이라서 어이가 없었다. 인도는 화장지가 귀한 나라이고 화장실에서도 물로 뒷처리를 하는 관습 때문에 많은 부피를 차지함에도 불구하고 그 두툼한 두루마리 화장지를 가방에 넣어갖고 다녔던 것이다. 처음에 나는 그를 정신이상쯤으로 여겼으나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나는 화가 나서 그를 불러 세웠다. 그리고 그 화장지는 내 물건인데 왜 함부로 가져가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인도인 남자는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서서 나를 뻔히 쳐다보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이게 왜 네 꺼냐? 네가 잠시 갖고 있는 것이지."
아열대의 뜨거운 태양 때문이었을까.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약간 현기증이 났다. 갑자기 머리속이 텅 비어버리고 그 속으로 바람이 들어온 듯했다.그 동안 나는 그런 비슷한 말을 명상서적에서 많이 읽었었다. 이 화장지는 네 것이 아니다. 네가 갖고 있다고 해도 그것은 네 것이 될 수 없다. 네 것이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한 평범한 인도인 남자가 내 앞에서 그런 말을 하자 왠지 현기증이 일었다. 나는 물이 쏟아져 나오는 공중수도 옆에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인도인 남자는 내 화장지를 손에 감은 채로 멀리 가버렸다. 나는 약간 화가 나기도 해서 혼자서 중얼거렸다.
"그래, 다 가져가라. 내 것이 아니고 내가 잠시 갖고 있는 것에 불과하니까 다 가져가라구."
그렇게 말하면서도 나는 나머지 화장지를 또 다른 인도인에게 빼앗기기 전에 얼른 배낭 안에 감춰버렸다. 어쨌든 화장지가 내 배낭 안에 있는 한 그것은 내 꺼였다.
며칠 뒤 나는 뭄바이에서 아그라로 가는 2등칸 열차 안에 있었다. 40시간 정도걸리는 긴 여정이었기에 나는 기차표 파는 여자에게 볼펜을 선물하면서까지 어렵사리 좌석표를 구했다. 좌석은 세명이 앉도록 되어 있었다.
나는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두 좌석이 마주보고 있어서 앞쪽의자에도 세 사람이 앉고 내 자리에도 나를 포함해 세 사람이 앉았다. 나 말고는 모두 인도인이었다. 터번을 두른, 독수리 같은 인상의 시크교인도 있었다. 그는 부리부리한 눈으로 줄곧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기차는 한밤의 누추한 정거장을 느릿느릿 빠져나갔다.
조금 가서 어떤 인도인 남자가 우리 좌석으로 다가오더니 엉덩이를 들이밀고 끼여앉았다. 미안하다는 말도 없이 당연히 자기 자리인 것처럼 좌석 한켠을 차지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우리 자리엔 네 명이 앉게 되었고 당연히 내 자리는 비좁아졌다.
두세 정거장을 지나가자 또다른 남자가 다가와 우리 좌석에 끼여앉았다. 그 역시 아무런 양해의 말도 없었다. 세 명이 앉게 되어 있는 좌석에 다섯 명이 앉았고, 내 자리는 형편없이 좁아졌다. 기차가 뭄바이를 떠난 지 두 시간밖에 안 자났으니 아직 서른여덟 시간의 긴 여정이 남아 있었다. 이제는 자리가 좁아져서 좌석 등받이에 기댈 수조차 없었다. 나는 잔뜩 구부린 자세로 차창에 얼굴을 부벼대야만 했다. 그러다가 얼핏 잠이 들었다.
잠결에 피곤을 느낀 나는 습관적으로 좌석 등받이에 등을 기대려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어떤 것이 걸리적거려서 눈이 떠졌다. 놀라서 뒤돌아보니 좌석 등받이와 내 등 사이의 좁은 공간에 또다른 인도인 남자가 와서 걸터앉아 있었다. 정말 상식밖의 행동이었다.
나는 더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런 불편한 자세로 서른다섯시간을 더 여행하느니 차라리 기차에서 뛰어내리는 편이 나았다. 화가 난 나는 벌떡 일어나 바지 주머니에서 내 좌석표를 꺼냈다. 그리고는좌석표도 없이 무례하게 끼여앉은 인도인들에게 일일이 보여주며 소리쳤다.
"이 자리는 내 자립니다. 이 표를 보세요. 여긴 내 자리라구요. 그러니 당신들은 다른 데로 가시오. 여긴 내 자리니까 내가 앉을 겁니다."
그러자 그 중의 한 남자가, 외모로 보아 쉰 살 저도 돼 보이는 평범한 남자가 나를 올려보며 조용히 말하는 것이었다.
"그런가? 넌 도대체 무슨 근거로 이 자리가 너의 자리라고 주장하는가? 이 자린 네가 잠시 앉았다가 떠날 자리가 아닌가? 넌 영원히 이 자리에 앉아 있을 것인가?"
또다시 훅하고 뜨거운 바람 같은 것이, 현기증 같은 것이 내 머릿속을 파고 들었다.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도대체 기차표 한 장을 사 갖고 지정된 좌석에 앉아서 가는 것조차 이렇게 힘들단 말인가.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이 남자의 말이 대단히 옳지 않은가. 잠시 앉았다가 떠나갈 자리를 놓고 나는 왜 어리석게 내 자리라고 소리높여 주장한단 말인가.
세번째로 내가 머릿속 뜨거운 바람을 체험한 것은 올드델리의 거리에서 물건을 살 때였다. 히말라야 산중 마을들은 한 해의 절반 정도가 폭설로 길이 차단되기 때문에, 그 기간 동안 주민들은 주로 은공예나 자수 등 수공예품을 만든다.
나는 뉴델리 옆의 올드델리의 거리에서 그 수공예품들을 발견하고 반가움이 일어 몇 개를 사고자 했다. 내가 다가가서 물건값을 묻자 인도인 청년은 우선 내 얼굴부터 살폈다. 내가 초보 여행자인가 아닌가를 살피는 눈치였다. 그러더니 그는 1천 루피라는 터무니없는 값을 불렀다. 우리 돈으로 3만원에 해당하는 실로 거금이었다. 아마도 나를 돈 많은 일본인으로 착각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나는 초보 여행자가 아니었다. 나는 인도인 청년을 째려보며 "1백 루피!" 하고 값을 내렸다. 그러자 그는 얼른 "150루피!"하고 소리치는 것이었다. 방금 전에 1천 루피라고 했다가 금방 150루피로 값을 내리면서도 표정 하나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면 그렇지, 하고 나는 이번에는 더 값을 내려 75루피를 불렀다. 청년은 고개를 저으며 110루피를 외쳤다. 남는 게 없어 그 이하로는 도저히 깎아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 역시 물러서지 않았다. 그렇게 흥정을 계속한 결과 마침내 나는 그 물건들을 모두 합해 70루피에 살 수 있었다. 나는 내 자신의 영리함에 스스로 뿌듯했다. 1천 루피를 부른 것을 70루피에 사다니! 이것은 후일의 여행담에 기록될 만한 사건이었다.
물건값으로 70루피를 받은 인도인 청년은 종이에 물건을 싸서 내게 내밀었다. 그것을 받아든 나는 기분이 좋아서 돌아섰다.
그때였다. 내 등 뒤에 대고 그 청년이 이렇게 묻는 것이었다.
"아 유 해피?"
너 행복한가? 그런 뜻이었다. 물건을 그렇게 싸게 사서 넌 행복한가? 행복하다면 얼마나 행복한가? 그리고 그 행복은 얼마나 오래 갈 행복인가? 그런 뜻이었다.
순간 나는 현기증이 일어 걸음을 옮길 수가 없었다. 다시금 뜨거운 바람 같은 것이 내 머릿속을 채우는 것이었다. 나는 돌아서서 인도인 청년에게 왜 그런 걸 묻느냐고 반문했다.
그가 말했다.
"당신이 행복하다면 나도 행복하다. 하지만 당신이 행복하지 않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당신의 문제다."
인도인 청년은 말을 마치고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나는 그 시선 앞에서 감히 내 자신이 행복하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없었다. 내 영리함을 한껏 발휘해 물건을 이토록 싸게 샀으니 참으로 행복하다. 그렇게 말할 수가 없었다.
그 후로 많은 여행을 하고 많은 가르침을 접했지만 나는 인도에서의 이 세가지 체험을 잊을 수 없다. 그때 머릿속으로 훅하고 불어들어온 뜨거운 바람 때문에 한동안 내가 나 같지 않았고, 내 삶이 내 삶인 것 같지 않았다. 어느 곳을 갈 때나, 어떤 것을 수중에 넣었을 때나, 그 말들이 내 귓전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ㅋㅋㅋ 재밌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