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소개] 『꽃샘바람에 흔들린다면 너는 꽃』
류시화 시인이 전작에 이어 10년 만에 내놓은 신작(2022년) 시집입니다. 총 71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시인의 서문을 인용합니다.
친애하는 독자여, 나는 그대가 아니고 그대는 내가 아니기에
내 노래가 그대의 노래는 아니며
내 희망이 그대의 희망은 아니리라
다만 우리 모두 회전하는 행성 위에 있다는 것
지금은 내 시가 그대에게 가닿지 않더라도
때로는 내 문장이 겨울을 이야기할지라도
단어들이 꽃씨처럼 땅에 흩어지기를
때가 되면 우리는 어떻게든
다시 꽃 피우는 법 기억해 낼 것이니
우리가 알고 있지만 자주 잊어버리는 마법을
그러므로 친애하는 독자여,
그대의 삶이 시를 잃었을 때
그대가 기억하는 내 시 한 편이
봄을 담고 그대에게 다가가기를
류시화
▣ 『꽃샘바람에 흔들린다면 너는 꽃』 / 류시화 / 수오서재 / 2022년 4월 11일 1판 1쇄 발행.
◉ 내용 보기
[1] 초대 (10~11쪽)
손을 내밀어 보라
다친 새를 초대하듯이
가만히
날개를 접고 있는
자신에게
상처에게
손을 내밀어 보라
언 꽃나무를 초대하듯이
겹겹이
꽃잎을 오므리고 있는
자신에게
신비에게
손을 내밀어 보라
부서진 적 있는 심장을 초대하듯이
숨죽이고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자신에게
상처에게
[2] 꽃샘바람에 흔들린다면 너는 꽃 (14~15쪽)
꽃샘바람에 흔들린다면
너는 꽃이다
모든 꽃나무는
홀로 봄앓이하는 겨울
봉오리를 열어
자신의 봄이 되려고 하는
너의 전 생에는
안으로 꽃 피려는 노력과
바깥으로 꽃 피려는 노력
두 가지일 것이니
꽃이 필 때
그 꽃을 맨 먼저 보는 이는
꽃나무 자신
꽃샘추위에 시달린다면
너는 곧 꽃이 될 것이다
[3] 흉터의 문장 (34~35쪽)
흉터는 보여 준다
네가 상처보다 더 큰 존재라는 걸
네가 상처를 이겨 냈음을
흉터는 말해 준다
네가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지
그럼에도 네가 살아남았음을
흉터는 물에 지워지지 않는다
네가 한때 상처와 싸웠음을 기억하라고
그러므로 흉터를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그러므르 몸의 온전한 부분을
잘 보호하라고
흉터는 어쩌면
네가 무엇을 통과했는지 상기시키기 위해
스스로에게 화상 입힌 불의 흔적
네가 네 몸에 새긴 이야기
완벽한 기쁨으로 나아가기 위한
완벽한 고통
흉터는 작은 닿음에도 전율하고
숨이 멎는다
상처받은 일을 잊지 말라고
영혼을 더 이상 아픔에 내어 주지 말라고
너의 흉터를 내게 보여 달라
나는 내 흉터를 보여 줄 테니
우리는 생각보다 가까우니까
[4] 수선화 (59~61쪽)
바다로 향하는 산책길
한 여인이 들판에 웅크리고 앉아
호미로 흙을 파고 있었다
아직은 이른 봄,
농사일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쳐다보자 동작을 멈추고
수선화를 묻는 거라고 소리쳐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들판 이곳저곳
흰 제주수선화가 무리 지어 피어 있었다
바닷바람에 몸을 가누며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수선화 구근을 묻기에는
구멍이 넓고, 깊었다
그런데도 여인은 멈추지 않고
땅을 파고 또 팠다
그녀는 구근을 갖고 있지도 않았다
그 대신 큼지막한 종이 상자 옆에
호미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 아이의 이름이 수선화예요.
나랑 십 년을 함께 살았어요."
그녀는 상자를 열어
그 안에 고이 모로 뉘어져 있는
흰 강아지를 보여 주었다
"하루 한 번은 여기에 나와서
뛰어 놀았거든요.
그런데 먼저 떠났어요.
암에 걸린 나를 두고."
이제는 그녀 대신 내가 호미를 들어
검은 흙을 힘껏 팠다
어떻게 이 돌투성이 검은 흙에서
흰 꽃이 피어나는 걸까
꽃을 만드는 흙과 심장을 만드는 흙은
다른 걸까
이내 그녀의 수선화가 묻혔다
그녀는 옷에 묻은 흙을 털지도 않은 채
흰 수선화들 사이로 천천히 걸어갔다
바닷바람에 겨우 몸을 가누며
새로 산 호미를 손에 들고서
[5] 고독과의 화해 (112쪽)
이따금 적막 속에서
문 두드리는 기척이 난다
밖에 아무도 오지 않은 걸 알면서도
우리는 문을 열러 나간다
어쩌면 그것은 우리 자신의 고독이
문 두드리는 것인지도
자기 밖으로 나가서
자신을 만나기 위해
문 열 구실을 만든 것인지도
우리가 사랑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우리를 발견하기를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