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소개]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삶이 나에게 가르쳐 준 것들』,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 이후 류시화 특유의 울림과 시선을 담은 신작 산문집. 자기 탐구를 거쳐 삶과 인간을 이해해 나가는 51편의 산문을 묶었다. 「마음이 담긴 길」 「퀘렌시아」 「찻잔 속 파리」 「화가 나면 소리를 지르는 이유」 「혼자 걷는 길은 없다」 「마음은 이야기꾼」 등 여러 글들은 페이스북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경희대 국문과 시절 은사였던 소설가 황순원 선생이 “시는 젊을 때 쓰고, 산문은 나이 들어서 쓰는 것이다. 시는 고뇌를, 산문은 인생을 담기 때문이다.”라고 한 말을 잊지 않고 있다고 저자는 말하지만, 젊은 시절 시작된 인간 존재와 삶의 의미에 대한 추구가 어떤 해답에 이르렀는지 서문 제목 ‘내가 묻고 삶이 답하다’에서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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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책 앞쪽 표지 안쪽의 저자 소개 중에서 발췌)
▣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 류시화 / 더숲 / 2017년 2월 25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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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퀘렌시아 - 자아 회복의 장소를 찾아서 (12~17쪽)
투우장 한쪽에는 소가 안전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구역이 있다. 투우사와 싸우다가 지친 소는 자신이 정한 그 장소로 가서 숨을 고르며 힘을 모은다. 기운을 되찾아 계속 싸우기 위해서다. 그곳에 있으면 소는 더 이상 두렵지 않다. 소만 아는 그 자리를 스페인 어로 퀘렌시아Querencia라고 부른다. 피난처, 안식처라는 뜻이다.
퀘렌시아는 회복의 장소이다. 세상의 위험으로부터 자신이 안전하다고 느끼는 곳, 힘들고 지쳤을 때 기운을 얻는 곳, 본연의 자기 자신에 가장 가까워지는 곳이다. 산양이나 순록이 두려움없이 풀을 뜯는 비밀의 장소, 독수리가 마음 놓고 둥지를 트는 거처, 곤충이 비를 피하는 나뭇잎 뒷면, 땅두더쥐가 숨는 굴이 모두 그곳이다. 안전하고 평화로운 나만의 작은 영역. 명상에서는 이 퀘렌시아를 ‘인간 내면에 있는 성소에 비유한다. 명상 역시 자기 안에서 퀘렌시아를 발견하려는 시도이다.
전에 공동체 생활을 할 때, 날마다 열 명이 넘는 방문객이 찾아왔다. 지방에서 온 이들은 며칠씩 묵어가기도 했다. 살아온 환경과 개성이 다른 사람들로 늘 북적였다. 다행히 집 뒤쪽, 외부인의 출입이 차단된 작은 방이 내게 중요한 휴식처가 되어 주었다. 그곳은 오로지 나만을 위한 공간, 나의 퀘렌시아였다. 한두 시간 그 방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을 다시 만날 기운이 생겼다. 그 비밀의 방이 없었다면 심신이 고갈되고 사람들에게 치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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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만이 아니다. 결 좋은 목재를 구해다 책상이나 책꽂이 만드는 일에 집중하고 있으면 번뇌가 사라지고 새 기운이 솟는다. 그 자체로 자기 정화의 시간이다. 좋아하는 공간, 가슴 뛰는 일을 하는 시간, 사랑하는 이와의 만남, 이 모두가 우리 삶에 퀘렌시아의 역할을 한다. 소음으로부터 벗어난 곳에서의 명상과 피정, 기도와 묵상의 시간, 하루 일과를 마치고 평화로운 음악이나 풀벌레 소리에 귀 기울이는 밤, 내면세계의 안식처를 발견하는 그 시간들이 모두 퀘렌시아이다. 막힌 숨을 트이게 하는 그런 순간들이 없으면 생의 에너지가 메마르고 생각이 거칠어진다.
투우장의 퀘렌시아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투우가 진행되는 동안 소는 어디가 자신에게 가장 안전한 장소이며 숨을 고를 수 있는 자리인지를 살핀다. 그리고 그 장소를 자신의 퀘렌시아로 삼는다. 투우사는 소와 싸움에 이기려면 그 장소를 알아내어 소가 그곳으로 가지 못하게 막아야 한다. 투우를 이해하기 위해 수백 번 넘게 투우장을 드나든 헤밍웨이는 “퀘렌시아에 있을 때 소는 말할 수 없이 강해져서 쓰러뜨리는 것이 불가능하다다.”라고 썼다.
삶은 자주 위협적이고 도전적이어서 우리의 통제 능력을 벗어난 상황들이 펼쳐진다. 그때 우리는 구석에 몰린 소처럼 두렵고 무력해진다. 그럴 때마다 자신만의 영역으로 물러나 호흡을 고르고, 마음을 추스르고, 살아갈 힘을 회복하는 것이 필요하다. 숨을 고르는 일은 곧 마음을 고르는 일이다.
히말라야 트레킹, 고산 부족과의 생활, 나를 가족처럼 보살펴준 오지 마을 사람들, 갠지스 강의 작은 배 위에 누워 무념무상하게 바라보던 파란 하늘, 앞니 네 개 부러진 탁발승과 사과를 깨물어 먹을 수 있는가 시험하며 천진난만하게 웃던 일들·······. 이런 ‘쉼’의 순간들이 없었다면 나 역시 건강한 삶을 유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누군가 말했듯이, 인생은 쉼표 없는 악보와 같기 때문에 연주자가 필요할 때마다 스스로 쉼표를 매겨 가며 연주해야만 한다.
가장 진실한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는 곳, 그곳이 바로 퀘렌시아이다. 나아가 언제 어디서나 진실한 자신이 될 수 있다면, 싸움을 멈추고 평화로움 안에 머물 수 있다면, 이 세상 모든 곳이 퀘렌시아가 될 수 있다. 신은 본래 이 세상을 그런 장소로 창조했다. 자연스런 나로 존재하는 곳으로, 아메리카 인디언들처럼 세상과 대지와의 교감 속에서 활력을 얻고 영적으로 충만해지는 장소로. 그런 세상을 투우장으로 만드는 것은 우리 자신들이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시간도 내게는 소중한 퀘렌시아의 시간이다. 트라피스트회 신부 토머스 머튼의 말대로 우리 안에는 새로워지려는, 다시 생기를 얻으려는 본능이 있다.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는 힘’을 자기 안에서 깨우려는 의지가. 우리는 본능적으로 자아 회복의 장소를 찾고 있으며, 삶에 매몰되어 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치유하고 온전해지려는 의지를 지니고 있다.
당신에게 퀘렌시아의 시간은 언제인가? 일요일마다 하는 산행, 바닷가에서 감상하는 일몰, 낯선 장소로의 여행, 새로운 풍경과 사람들과의 만남·······. 혹은 음악이든 그림이든 책 한 권의 여유든 주기적으로 나를 쉬게 하고, 기쁘게 하고, 삶의 의지와 꿈을 되찾게 하는 일들 모두 퀘렌시아가 될 수 있다. 좋은 시와 글을 종이에 베껴 적거나 소리내어 읽는 것 같은 소소한 일도 그런 역할을 한다.
긴 여행이 불가능할 때 나는 이틀 정도 시간을 내어 제주도의 오름을 오르거나 사려니숲길을 걷는다. 그곳에서 흙과 햇빛과 바람, 성스러운 기운들과 일체가 된다. 그때 발걸음이 곧 날개가 된다. 자연과 연결되는 장소, 대지와 하나 되는 시간만큼 우리를 회복시켜 주는 것은 없다. 그때 우리는 인도의 오래된 경전 『아슈타바크라 기타』의 말을 이해하게 된다.
‘삶의 파도들이 일어나고 가라앉게 두라. 너는 잃을 것도 얻을 것도 없다. 너는 바다 그 자체이므로.’
삶에서 소중한 것을 잃었을 때, 매일매일이 단조로워 주위 세계가 무채색으로 보일 때,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상처 받아 심장이 무너질 때, 혹은 정신이 고갈되어 자신이 누구인지 잊어버렸을 때, 그때가 바로 자신의 퀘렌시아를 찾아야 할 때이다. 그곳에서 누구로부터도, 어떤 계산으로부터도 방해받지 않는 혼자만의 시간, 자유 영혼의 순간을 가져야 한다. 그것이 건강한 자아를 회복하는 길이다.
나의 퀘렌시아는 어디인가? 가장 나 자신답고 온전히 나 자신일 수 있는 곳은? 너무 멀리 가기 전에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와야 한다. 나의 퀘렌시아를 갖는 일이 곧 나를 지키고 삶을 사랑하는 길이다.
[2] 화가 나면 소리를 지르는 이유 - 두 가슴의 거리 (23~27쪽)
(중략)
영적 스승 메허 바바가 들려주는 우화이다. 우리가 서로에게 화를 낼 때, 특히 연인이나 가족이나 부부 사이에 소리를 지를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일깨우는 아름다운 가르침이다. 화가 나면 마음이 닫혀 버리기 때문에 상대방이 멀게 느껴진다. 그것이 화의 작용이다. 반면에 사랑은 가슴의 문을 열어, 멀리 있는 사람도 가깝게 느껴지게 한다. 그것이 사랑의 작용이다.
갈등의 10퍼센트는 의견 차이에서 오며, 나머지 90퍼센트는 적절치 못한 목소리와 억양에서 온다는 심리학의 통계가 있다. 목소리의 크기가 옮음의 척도는 아니다. 소리를 지르는 관계는 가슴이 멀어진 관계이다. 그래서 자기 말이 들리게 하려고 더 크게 소리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두 가슴은 더욱 멀어진다. 소리친 다음의 침묵은 가슴이 죽어 버렸음을 알려 주는 신호이다.
우리는 가까운 사람에게 더 자주 소리를 지른다. 낯선 사람에게 소리를 지르는 경우는 드물다. 더 사랑해야 할 사람에게 더 상처를 주는 것이다. 다음번에 화가 날 때 이 우화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목소리의 크기는 가슴과 가슴 사이의 거리에 비례한다는 것을. 그리고 소리의 크기만큼 더 멀어지는 관계가 된다는 것을.
소리 지를 때 더 고통받는 것은 상대방이 아니라 나 자신이다. 불붙은 석탄을 던지는 사람은 자신부터 화상을 입는다. 내가 사람들에게 화를 내면서 깨닫는 것은 그러한 행동이 나를 주위 세상으로부터 더 고립시킨다는 것이다. 혹시 우리는 회복하기 어려울 정도로 멀어진 관계 속에서 소리를 지르고 있는 고독자가 아닐까.
남태평양의 섬에 사는 어느 부족은 쓸모없는 나무를 제거해야 할 때면 온 부족민들이 모여 그 나무를 향해 이렇게 소리를 지른다고 한다. “넌 필요 없는 나무야!” “넌 아무 가치가 없어!” 도끼나 톱으로 자르는 대신 그렇게 계속해서 큰소리로 “쓰러져라! 쓰러져라!” 하고 외치면 얼마 안 가 나무가 시들어 죽는다는 것이다. 화가 나서 지르는 소리는 거리를 멀어지게 할 뿐 아니라 서로의 영혼을 죽게 한다.
상대방이 나에게 소리를 지른다면, 그것은 나를 필요로 한다는 뜻이고 거리를 좁히고 싶다는 뜻이다. 다정한 관계를 묘사하는 단어 중에 ‘첩첩남남喋喋喃喃’이라는 말이 있다. ‘작은 목소리로 즐겁게 이야기를 주고받는 모양이나 남녀가 마음이 맞아 정답게 속삭이는 모습’을 의미한다. 가슴이 더 멀어지지 않게 하는 방법은 소리치지 않기, 작은 목소리로 말하기이다.
[3] 장소는 쉽게 속살을 보여 주지 않는다 - 사랑하면 다가오는 것들 (104~109쪽)
(중략)
장소들은 본래의 모습을 쉬이 드러내지 않는다. 여행자는 며칠만에 장소가 가진 신비에 접근할 수 있으리라고 믿고 먼 길을 찾아가지만 그것은 그의 착각일 뿐이다. 오랜 수고와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장소는 자신의 진정한 얼굴을 보여 주지 않는다. 낯선이의 발자국 소리가 들리면 장소의 요정들은 재빨리 모습을 감춘다.
그래서 현명한 체하는 조언자들은 신비주의에 현혹되지 말라고 경고한다. ‘갠지스 강은 영감 충만한 곳이 아니라 똥물이며, 시체 소각장 때문에 해로운 연기가 자욱하다. 소를 숭배하는 문화라서 지천에 널린 소똥을 피해 다녀야 한다. 느긋한 국민성 탓에 기차는 대여섯 시간 연착하는 게 보통이고, 매 순간 사기꾼들을 경계해야 한다. 인도에는 카레조차 없다.’ 이런 글들이 인도 여행에 대한 흔한 감상평이다.
우리가 장소에 대해 실망하는 것은 아직 그 장소가 가진 혼에 다가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가슴을 그곳에 갖다 대지 않은 것이다. 아직 자신과 그 장소가 분리되어 있는 것이다. 어느 신전 문의 현판에 적힌 ‘이곳에 들어오려면 머리를 바쳐야 한다.’는 지시를 따르지 않은 것이다.
서귀포에 살 때 친구로 지낸 사진작가 김영갑에게서 나는 중요한 것을 배웠다. 어느 평론가도 섰듯이 그는 364일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오름에 올랐다. 앉아서도 오름을 보고, 서서도 보고, 누워서도 보았다. 그렇게 해서 그는 누구에게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오름의 혼을 사진에 담았다. 스쳐 지나가는 관광객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혼을.
그 후 나는 월든 호수를 열 번 가까이 갔다. 봄에도 가고 가을에도 갔다. 호수를 돌기도 하고, 물가에 앉아 있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소로와 상관없는 나의 월든 호수를 발견했다. 오하이밸리는 캘리포니아에 갈 때마다 들렀다. 지도도 필요 없게 되었으며, 나중에는 내 아들을 그곳 학교에 보냈다. 그곳에서 지금까지 우정이 이어지는 친구를 만나, 크리슈나무르티가 산책하던 길을 함께 걷곤 했다. 이제 그곳은 언제나 그리운 오하이밸리가 되었다.
라다크는 여섯 번을 갔다. 『오래된 미래 Ancient Futures : Learning from Ladakh』의 저자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도 그곳에서 만나고, 마당 가득 꽃을 심는 게스크하우스 부부와 한 가족이 되었다. 그들은 숙박료도 사양하며, 라다크의 사원들과 인더스 강 유역의 마을들로 나를 데리고 다녔다. ‘줄레, 줄레!’ 하며 라다크 식 인사로 아침 잠을 깨우던 그들의 목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하다. 내 정신의 파편이 흩어져 있는 라다크!
갠지스 강이 흐르는 바라나시는 25년째 해마다 가고 있다. 내 눈이 깊지 않아선지 이제야 조금씩 보인다. 장소들과 그곳에 사는 아름다운 사람들이. 평범한 일상에 가려진 웃음과 슬픔의 물감 축제들이. 이제는 바라나시만을 무대로 여행기 한 권을 쓸 수도 있게 되었다.
낯선 나라와 장소들을 여행한 사람들은 곧잘 실망감을 감추지 못한다. 그들은 그 장소에 대한 긍정적인 여행담을 비난하고 허구라고 단정 짓는다. 그들의 말이 옳다. 한 장소를 오래 만나지 않으면 어떤 이야기도 허구일 수밖에 없다. 장소의 혼들은 처음에는 매력 없는 면만을 보여 줄 것이다. 당신 자신도 그렇듯이 장소 또한 낯선 이를 경계하기 때문이다. 돈을 뜯으려는 호객꾼과 가방을 뒤지는 여인숙 종업원과 길게 널린 소똥들로 당신을 쫓아 보낼 것이다.
여행은 얼마나 ‘좋은 곳’을 갔는가가 아니라 그곳에서 누구를 만나고 얼마나 자주 그 장소에 가슴을 갖다 대었는가이다. 중요한 것은 마음으로 봐야 하며, 그것에는 시간이 걸린다. 세상의 모든 장소들은 사리와 숄로 얼굴을 가린 여인과 같다. 낯선 자가 다가오면 더 가릴 것이다. 그리고 색색의 천 뒤에서 검은 눈으로 쳐다볼 것이다.
세상에는 시간을 쏟아 사랑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이 많다. 가고, 또 가고, 또다시 가라. 그러면 장소가 비로소 속살을 보여줄 것이다. 짐은 최소한으로 줄이고, 일정은 계획한 것보다 더 오래 잡으라. 인생은 관광tour이 아니라 여행travel이다. 그리고 여행은 고난travail과 어원이 같다. 장소뿐만 아니라 삶도 쉽게 속살을 보여 주지 않는다. 우리가 삶을 사랑하면 삶 역시 우리에게 사랑을 돌려준다. 사랑하면 비로소 다가오는 것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