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소개] 『딱정벌레』
『딱정벌레』는 류시화 시인의 두번째 산문집으로 “살아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별난 사색”이라는 부제(副題)가 붙어 있습니다. 내용은 자연과 명상, 산책에 대한 관찰 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어떻게보면 개인적이라고 할 수도 있는 글들도 다수 발견됩니다. 그래서일까요? 이 책은 지금 현재 전혀 구할 수가 없습니다. 절판(絶版)된 지도 꽤 오래 된 것 같고, 큰 도서관에서가 아니면 찾기도 힘든 실정입니다. (운영자)
이 글은 어느날 내 방으로 날아들어와 여름 한 철을 나와 함께 보낸 딱정벌레에 대한 별난 사색이다. 도시를 떠나 '섬'에서 살아가는 나날들, 삶에 대한 몇 가지 질문, 자연과의 고감, 현실과 환상의 기록이다.
사과를 먹다가 벌레를 발견하는 일보다 더 낭패스러운 일은 벌레를 반 마리만 발견했을 때이다. 나는 이 글들에서 절망과 희망의 깊이를 가능한 한 감추고자 했으며, 세계에 대한 35세의 이해를 숨김없이 드러내고자 했다. 영원을 꿈꾸지만 부서지기 쉬운 것들, 그것들을 나는 사랑할 수밖에 없다.
- 류시화
※ 참고 : 여기서의 ‘섬’은 제주도를 말하며, 이 책에 실린 대다수의 글들은 류시화 시인이 제주도에 머물 때 쓴 글입니다.
- 차례 -
풍경속으로 들어가는 산책 - 이문재(시인) 해설
제1부 섬에는 태양이 떠올랐다
다시 찾은 날들
섬에는 태양이 떠올랐다
제2부 생(生)은 다른 곳에
생(生)은 다른 곳에
사랑하는 자는 집에 머문다
허공을 나는 새
시월의 빛
꽃매장(花葬)
구름의 언덕 아래서
영원을 꿈꾸지만 부서지기 쉬운 삶-나비
나비에게 길을 묻다
바다를 바라보는 오후
무지개 같은 나날
제3부 저녁별이 아침꽃으로 피다
안개 속에서 길을 잃다
안개 속에서 또 길을 잃다
존재에 대한 또다른 스무 개의 질문
눈 속의 산책
섬에서 쓰는 편지
거미에게 말을 가르치며
별이 내게로 온다
슬픔이 아침시간을 지나간다
비가 전하는 소리
날으는 새는 곧 앉는다
땅이 낯설어 하늘을 본다
나의 인디아 꿈
먼 곳은 이다지도 그리운 것
제4부 딱정벌레에 대한 별난 사색
딱정벌레에 대한 별난 사색
마지막에 이르러
▣ 『딱정벌레 - 살아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별난 사색』 / 류시화 / 푸른숲 / 1993.3.18. 1판 1쇄 펴냄 / (절판).
◉ 내용 보기
[1] 다시 찾은 날들 (21~28쪽)
그새 그는 몰라보게 얼굴이 늙었고, 머리에는 흰 서리가 내려 있었다. 그를 다시 만난 것은 꼭 다섯 해만의 일이었다. 그러나 내가 그를 몰라볼 리는 없었다. 그는 벙어리였기 때문이다.
5년 전 봄에 나는 이 섬에 여행을 와서 일주일 남짓 머문 적이 있었는데, 아침 무렵에 호텔 앞 해변가로 산책을 나갔다가 그를 알게 되었다. 봄이라지만 아직 꽃은 찾아볼 수 없었으며, 호텔 정원에 가꾼 관상화만이 노란 색조를 빛내고 있었다. 절벽에 난 길을 따라 검은 현무암이 널린 해변으로 내려가자 아침의 태양과 함께 느넓은 바다가 모습을 드러냈다. 언제나 찾아와도 변함없는 바다. 잠에 취했던 주변의 작은 섬들과 해변가 가옥들이 태양 아래서 눈을 깜박이고 있었다.
마침 썰물이었던 바닷물이 방향을 바꾸어 밀려 들어오는 시각이라서 현무암 돌 틈으로 물이 출렁거렸다. 이끼 낀 돌에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조심하면서 나는 돌들을 밟고 바다 쪽으로 걸어나갔다. 언제나처럼 바다는 생명의 활기를 잃지 않고 있었다. 물 속을 들여다보지 않아도 그 안에서 헤엄치고 있을 게딱지와 우럭과 새끼소리들의 부산함 움직임이 느껴졌다. 인기척에 놀란 의심 많은 게들은 다가가 말을 걸어볼 틈도 주지 않고 바위 뒤로 모습을 감추었다.
먼산 꼭대기에는 아직 흰 눈이 쌓여 있었지만, 바다에 나오니 봄의 느낌이 피부에 와 닿았다. 공기는 신선하고 부드러웠다. 도회지에서 느끼지 못하던 평온함과 한가로움에 젖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때 저만치서 한 남자가 돌 위에 몸을 구부리고 앉아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소라나 전복을 따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도회지 생활에만 길들여진 나로서는 바위 틈에 수없이 널린 딱딱한 껍질의 조개들이 신기하기만 하고 어느 게 먹는 것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바다는 돌 밑에서 출렁거리며 밀려왔다가 다시 밀려갔다. 그 틈에서 푸른 바닷말 하나가 물의 이동에 따라 누웠다가 다시 일어서곤 했다. 동쪽 바다로 얼굴을 돌리면 수면이 아침해를 튕겨내면서 마치 어떤 음악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태양광선의 활과 바다의 현(弦)이 만나 연주해 내는 음악이었다. 조금전 그 남자는 여전히 돌 위에 앉아서 몸을 구부린 채 미동도 하지 않고 물 속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서야 나는 그가 낚시를 하고 있음을 알았다. 1미터도 안 되는 가느다란 철사 끝에 그 절반 길이의 낚싯줄을 매달아 돌 틈에 집어넣고 마냥 앉아 있는 것이었다. 내가 무엇을 잡는 거냐고 물어도 그는 나를 힐끗 쳐다보기만 할 뿐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5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얼굴에 키는 작고 손은 거칠었다. 어촌에서 흔히 마주치게 되는 그런 평범한 차림새였다. 하지만 그에게는 왠지 모를 다른 분위기가 있었다. 뭐라 설명하긴 어려워도 눈빛이 어슴푸레하면서 가끔 섬뜩한 시선이 엿보이곤 했다. 어쩌면 건너편 수면에서 반사되는 햇살 때문에 그렇게 느껴지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런데 아이들이 장난하는 것 같은 그런 낚싯대를 갖고서 대체 무엇을 잡겠다는 걸까? 돌들이 물에 잠겨서 더 이상 바다쪽으로 나아갈 수도 없고 해서 나는 그 남자 옆에 쪼그리고 앉아 무엇을 잡나 구경하기 시작했다. 그는 때묻은 바지에 검정 고무신을 신고 있었다. 신발 앞쪽이 다 닳아서 엄지발가락 하나가 바깥으로 삐져나와 있었다. 한 손은 구부린 무릎에 얹고 다른 산 손은 철사를 움켜쥐고서 온 신경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손톱은 여기저기 갈라지고 손가락도 투박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러한 사람들은 자기를 꾸미는 일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 우리도 소위 문명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그들은 얼마나 무관심한가? 도시의 문화가 아무리 밀려 들어와도 그들은 여전히 자연 그대로 살아간다.
그때였다. 돌 틈에 기울이고 있던 철사줄이 눈에 띄게 휘어졌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남자는 재빨리 낚아채었다. 그랬더니 검은색 몸뚱이를 가진, 장어처럼 미끈거리는 놈이 낚싯바늘에 입이 꿰인 채 딸려나왔다. 길이는 손바닥만했지만, 어찌나 힘이 좋은지 낚싯줄이 끊어질 것만 같았다. 구경하고 있는 나까지도 흥분이 되었다.
그 남자는 그것을 내게 높이 쳐들어 보이면서 소리쳤다.
"보, 보, 보!"
그 순간 나는 알아차렸다. 그는 벙어리였던 것이다. 내 질문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이유를 그제서야 나는 알았다. 그리고 그 어슴푸레하면서도 섬뜩한 눈빛의 이유까지도.
그 물고기의 이름은 '보들레기'였다. 그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 그는 발음도 안 되는 혀로 "보, 보, 보!"하고 외쳤던 것이다.
그날 밀물이 다 들어와 돌들이 완전히 물에 잠길 때까지 나는 벙어리 남자와 함께 자리를 옮겨가며 보들레기를 잡았다. 미끼는 바위에 붙은 고둥을 잡아서 썼다. 돌 틈의 출렁이는 물 속에 철사줄을 담그고 있다가 보들레기란 놈이 잡혀 올라올 때마다 우리는 환성을 지르며 아이들처럼 즐거워했다. 벙어리 남자가 한 마리 잡으면 그 다음에는 내가 잡았다.
마침내 바닷물이 다 들어차 우리의 놀이는 끝이 났다. 우리는 열 마리도 넘는 보들레기를 비닐봉지에 담아 갖고서 그의 집으로 갔다. 해변에서 걸어 5분 거리에 있는 다 쓰러져가는 집이었는데 그는 그곳에서 혼자 살고 있었다. 자식과 아내가 있었지만 다들 떠나갔는지, 아니면 원래부터 혼자 살았는지 나는 묻지도 않았고 또 벙어리인 그에게 대답을 들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우리는 쪽마루에 걸터앉아 잡아온 보들레기를 날것으로 나눠 먹었다. 나는 벙어리 남자가 능숙하게 칼질해 주는 보들레기 회를 사양도 않고 받아먹었고, 도중에 내가 근처의 구멍가게로 걸어나가서 소주를 사다가 함께 마셨다. 우리는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가끔씩 시선이 마주칠 뿐이었고, 그때마다 벙어리 남자는 연신 손을 내저으며 더 먹으라는 시늉을 했다. 나는 일부러 어두워져 가는 마당을 바라보면서 술을 마셨다. 그리고는 저녁 늦게 호텔로 돌아와 곤한 잠을 잤다.
우리의 만남은 그것으로 끝난 게 아니었다. 다음날 아침 나는 다시 바닷가로 나갔고, 또 벙어리 남자를 만났으며, 그날도 밀물을 피해 자리를 옮겨가면서 보들레기를 잡았다. 전날보다 허공 중의 햇살이 더 따사로웠고, 보들레기도 더 많이 잡혔으며, 우리는 또다시 저녁 늦게까지 무언의 대화를 나누면서 쪽마루에 앉아 보들레기 안주에 소주를 마시고 헤어졌다.
그리고 다음날 나는 섬을 떠나 서울로 돌아가야 했다. 아침 일찍 비행기 예약을 확인하고 나서, 나는 잠깐 바닷가로 나가 벙어리 남자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떠날까 망설였다. 호텔 창문으로 바다가 내다보이긴 했지만 거리가 멀어서 그의 모습을 확인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왠지 그가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았다.
짐가방을 호텔 로비에 맡겨 두고서 나는 천천히 걸어 바깥으로 나왔다. 바다 쪽으로 내려가는 산책로가 보였다. 나는 내 자신이 벙어리 남자와 작별인사를 하는 단순한 일을 무척이나 망설이고 있음을 알았다. 나는 바다 쪽을 굽어보다가 방향을 바꿔 근처의 시장으로 옮겼다. 그곳에서 나는 눈에 띄는 신발가게로 들어가 검정 고무신 한 켤레를 샀다. 공항으로 가는 버스 출발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나는 걸음을 재촉해 벙어리 남자의 집까지 걸어가서, 함께 앉아 술을 마시던 쪽마루 위에 검정 고무신을 놓아두고 곧 떠났다.
누구에게나 그렇듯이 세월이 흐르고, 그 시간들 속에서 또 가끔은 우연치 않은 재회의 순간이 있기 마련이다. 그를 다시 만난 것은 꼭 다섯 해만의 일이었다. 답답한 도회지 생활을 떠나 이 섬으로 이사를 오기로 마음먹었을 때까지만 해도 나는 벙어리 남자를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도시에 살면서 가슴 속이 무엇인가 비어만 가고 자꾸만 내가 나를 잃어버리고 있다는 허전함 때문에 마침내 나는 떠나기로 결정을 내렸다. 어딘가 다른 곳으로. 어딘가 자연의 숨결이 있고, 내가 나 자신과 마주할 수 있는 곳으로.
섬에 도착해 배편으로 미리 부쳐진 이삿짐을 풀고, 주소를 이전하고, 몇 가지 일상적인 일들을 정리하고 나서, 나는 문득 내가 만나야 할 어떤 사람을 어렴풋이 기억해 냈다. 이 섬에서 나와 안면이 있는 유일한 사람, 바로 닷 해 전의 그 벙어리 남자였다. 그러나 나는 자신이 없었다. 그가 나를 기억할지도 의문이었고, 그의 집을 찾을 수 있을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나는 생각만 해둔 채로 며칠을 미루었다.
이사와서 그럭저럭 보름이 지난 어느날 아침, 나는 모처럼만에 다시 찾아온 봄 햇살을 맞으러 집 주변으로 산책을 나갔다. 새로운 건물들도 들어서고 자동차도 많아졌지만 어렴풋하게나마 옛길의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벙어리 남자의 집은 생각보다 쉽게 찾아졌다. 내가 이사온 집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거리였다. 나는 도중에 길을 잃지 않기 위해 5년 전에 묵었던 호텔을 기점으로 해서 봄빛을 받으며, 길에서 주운 막대기를 들고 한가롭게 걸어 그의 집에 이르렀다. 허물어져가는 돌담, 누추한 지붕은 옛날 그대로였다. 쪽마루도 그대로 있었다. 그 순간 '보들레기'라는 이름도 내 기억의 물 밑에서 떠올랐다.
열린 대문을 지나 마당으로 들어서자 벙어리 남자가 어두컴컴한 부엌에서 뭔가를 하고 있다가 밖으로 나왔다. 나는 한눈에 그을 알아보았다. 내 기억 속의 얼굴보다는 더 많이 늙어 있었고, 중년의 나이에서 어느새 초로(初老)의 길에 접어들어 머리까지 희게 변해 있었지만 나는 금방 그를 알아보았다.
벙어리 남자는 처음에는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듯했다. 언뜻 스쳐지나간 만남을 기억하기에는 5년은 짧은 세월이 아닌 것이다. 아니면 그새 눈이 어두워져서 대문가에 서 있는 내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는 부엌 앞에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서 한참이나 나를 바라보았다.
변하지 않는 것이 있으랴. 세월은 다른 어느 곳보다도 인간의 얼굴 위에 그 흔적을 남기고 달아난다. 변함없는 물빛과 하늘빛을 만나기 위해 섬으로 이사왔으나, 나는 벙어리 남자의 얼굴에서 어쩔 수 없는 세월의 흔적을 보게 되었다. 이마에 깊게 패인 주름, 빛을 잃어가는 눈동자, 관절염을 앓아 구부러져가는 무릎. 그런 나 또한 많이 변했을 것이다. 20대의 청춘과 열기는 어느덧 시들고 이제 30대 중반에 이르러 벌써부터 현실의 일을 피하기 위해 아는이 하나 없는 낯선 섬으로 이사를 왔던 것이다.
벙어리 남자가 끝내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아서 나는 그에게로 다가가 그의 눈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
"보들레기, 보들레기!"
그러자 벙어리 남자의 눈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나를 잊지 않은 것이다. 우리는 마주선 채 말없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이따금씩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이 난 듯, 벙어리 남자는 나더러 잠깐 기다리라는 시늉을 하고는 서둘러 방안으로 달려가더니 검정 고무신 한 켤레를 들고 나와서 내게 쳐들어 보이는 것이었다. 그때까지 한 번도 신지 않았는지 아직도 새것 그대로였다. 그는 그것을 손에 들고 내 얼굴을 바라보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우리는 짤막한 철사줄 두 개를 준비해 갖고서 함께 봄날의 바닷가로 나갔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은 있는 법이다. 우리가 마음을 먹기만 하면 그러한 것은 언제나 되찾을 수 있다. 벙어리 남자와 나는 다시 5년 전처럼 바닷물이 출렁거리며 밀려들어오는 돌 위에 앉아 철사줄을 드리우고 보들레기를 낚기 시작했다.
먼산에는 아직 흰 눈이 쌓여 있었지만 대기는 봄빛으로 완연했다. 구름이 한두 겹 걸린 산봉우리에서 수직으로 흰 연기가 솟아 올라 봄이 되었음을 더욱 실감나게 해주었다. 얼마나 기다렸던 봄인가! 성급한 꽃들은 벌써부터 해변의 절벽에서 노랗고 붉은 색조를 하늘거리고 있었다.
철사줄이 휘어지고, 벙어리 남자가 먼저 보들레기를 낚아올렸다. 검은 윤기가 흐르는 기운센 놈이 낚싯바늘에 꿰인 입술이 아파서 못 견디겠다는 듯 마구 몸을 뒤틀었다. 관절염 걸린 무릎을 똑바로 펴지도 못한 채 벙어리 남자가 보들레기를 하늘 높이 쳐들고서 외쳤다.
"보, 보, 보!"
나에게는 그 말이 마치 "봄, 봄, 봄!"하고 외치는 것처럼 들렸다.
[2] 나비에게 길을 묻다 (120~130쪽)
나비가 어른거리기 시작하는 3월에 섬으로 이사온 나는 그날그날에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일기로 적어놓곤 했는데, 나중에 되읽어 보니 대부분의 시간을 산의 나비를 찾아다니며 보내고 있었다. 낯선 곳에 도착해서, 글 쓰는 일 이외에는 아무런 생계수단을 마련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그것이 현실의 지루함을 잊기에 더없이 좋은 소일거리였다.
며칠 여행을 떠났던 곳에서 한 해나 두 해 머물러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보라. 아름답던 풍경은 이내 딱딱해지고, 더구나 그곳이 바다가 띠처럼 에워싼 작은 섬이라면 매번 발길을 돌릴 곳도 마땅치 않다. 이리하여 잠만 늘어난다. 처음에는 그토록 경탄하여 마지않던 낮의 태양빛과 결별하고, 방안에는 주로 시간을 보내게 된다. 풍경과 만나기 위해 떠났던 여행이 결국은 풍경으로부터 소외되는 결과를 낳고 마는 셈이다. 이때부터는 등을 돌리고 떠났던 도시의 인위적인 풍경이 슬슬 그리워지기 시작한다. 영화관이 그립고, 카페의 소음이 그립다. 막바로 신간서적과 만날 수 있는 대형서점이 그립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것들과 다시 해후하기 위해 짐을 챙겨 성급히 도시로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남의 이목은 때로 우리를 한곳에 붙박아 두는 중요한 힘을 발휘한다.
이럴 때 예기치 않게 나비 관찰에 몰두하게 된 것은 나로선 정신과 육체 양면으로 아주 좋은 일이었다. 한때 나는 명함에다 아예 직업을 '곤충연구가'라고 적어넣을까를 고려했을 만큼 살아 있는 작은 것을 관찰하는 일에 일가견이 있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인내심과 열의가 있었다는 얘기지만, 그만큼 생의 지루함을 느끼고 있었다는 뜻도 된다. 무릇 취미란 생의 지루함을 잊기 위해 인간이 만들어낸 종교 대용품일 뿐이다. 분재 가꾸기나 돌 모으는 일에 신앙처럼 매달리는 사람을 보라. 심지어 소용없는 복권을 첫회부터 수집하는 사람도 있다. 이것을 광적이라고 탓하기 전에, 우리는 인생을 터무니없이 지루하게 만든 우리의 신을 탓해야 할지도 모른다. 하긴 신마저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그 역시 지루함을 잊기 위한 하나의 취미로 세상을 창조하지 않았다고 누가 입증할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섬에 도착했을 때는 아직 3월도 다 가지 않은 때였으나 남쪽의 따뜻한 섬이라서 들판과 산길엔 어느새 풀꽃이 만발해 있었다. 주로 눈에 띄는 나비는 샛노란색을 자랑하는 남방노랑나비와 배추흰나비였으며, 여름이 가까워져선 날개 한복판에 길다랗게 옥석(玉石)이 박힌 청띠제비나비가 많이 어른거렸다.
나는 '나비'라는 수필집을 남긴 헤르만 헤세처럼(그 책은 헤세 사후에 그가 나비에 대해 쓴 글들을 모아 엮은 것으로 '한 곳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사람을 부러워하면서도 언제나 낯선 세계와 자연을 그리워하는 작가 자신의 꿈'이 잘 표현되어 있다) 열정적인 나비 사냥꾼도 아니고, 그렇다고 산길을 동행할 전문적인 나비 연구가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 산길에는 나 혼자뿐이었다. 어쩌다가 고사리 등속의 나물을 캐 모으는 아낙네들 --- 얼굴이 까맣고 몸집이 작은 그들은 4월이 되자 그 숫자가 나비떼만큼이나 많아졌는데 --- 과 마주칠 뿐이었고, 저녁 무렵 내가 허전한 발걸음으로 터벅거리며 산을 내려올 때쯤이면 그들도 푸대자루에 가득한 나물을 머리에 이고 오솔길을 내려가거나, 아니면 땅거미가 깔리는 도로가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어쩌다 지나가는 버스를 잡아타기 위해 마냥 기다리는 것이었다.
한번은 주로 들판을 날기 때문에 고산지대에선 보기 힘들다는 왕나비를 발견하고 그 뒤를 쫓아가다가 어느 노인가 마주쳤다. 그는 평범한 옷차림에 다 떨어진 모자를 쓰고서 산길을 내려오고 있었다. 우리가 관심을 갖고 보기만 하면 놀랍게도 이러한 사람이 주위에 너무도 많듯이, 그는 자기를 치장하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옷을 걸치고 신발 또한 인간의 품위라든가 멋하고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그는 그러한 인위적인 장식물에 초연한, 다만 한 사람의 시골 노인이고 숨쉬는 인간일 뿐이었다. 가끔 그러한 사람들과 마주치면 나는 새삼 경탄하게 된다. 자연스러움은 그 자체만으로 얼마나 큰 힘인가? 그러한 자연스러움이 나는 무섭다. 그 자연성이 나의 인위성을 일깨우고 나를 한없이 초라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나비를 쫓아 잰걸음으로 걸어가던 나는 노인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고, 우린 산길에서 마주친 사람들답게 몇 마디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정확히 말해 '나눈' 것은 아니었다. 나는 그가 구사하는 섬 지방 특유의 사투리를 절반도 알아들을 수 없어서 무슨 외국어를 듣는 양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어떤 상황에서, 언어는 생각만큼 중요한 것이 아니다. 서너 해 전 인도여행을 할 적에도, 나는 낯선 고장에서 영어로 말하는 것이 지겨워져서 아예 한국말로 인도인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러면 인도인들은 힌두어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했다 우리는 서로의 입술이 발음하는 언어를 통 알아듣지 못했지만, 서로의 마음의 언어는 읽을 수 있었다. 언어를 초월한 소통과 교감의 차원이 생겨난 것이다. 언어는 물건의 차원을 벗어나면 금방 무력해진다. 더구나 그것이 철저히 내밀한 느낌과 경험을 요구하는 인도여행일진대 남의 나랏말인 영어로 대화를 나눈다는 것은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노인과 내가 그러했다. 우리는 별다른 얘기를 나눈 것도 아니었지만, 또한 사투리로 된 대부분의 명사와 동사를 알아듣지 못하고 넘어갔지만, 나는 그가 좋아졌고 따뜻하게 느껴졌다. 따뜻하게 느껴진다는 것은 그가 타인처럼 느껴지지 않는다는 의미다. 때로 자기 자신마저 타인처럼 느껴지는 삶에서, 타인을 자신처럼 느낀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노인이 친밀감을 준 것은 그의 말투와 얼굴 표정이 가진 세월의 깊이였다. 절망과 희망의 깊이는 누구라도 흉내낼 수 있지만, 세월의 깊이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게 아닌 것이다.
노인은 나에게 산길에서 뱀을 조심하라고 일렀다. 이제 얼었던 흙이 풀렸으니 뱀이 돌아다니는 철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길이 난 곳으로만 가되, 길에서도 막대기로 미리 풀섶을 쳐서 사람이 가고 있다는 것을 뱀에게 알려야 한다고 노인은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산의 세세한 지형을 설명해 주었다. 나는 도움을 받은 답례로 뭔가를 노인에게 선물하고 싶었다. 하지만 산길에서 내가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양쪽 바지 가랑이에 졸라맸던 고무밴드를 풀어 노인에게 주었다. 그 고무밴드는 등산할 때 쓰는 물건으로, 바지 끄트머리에 졸라매면 너풀거리지 않아 산길을 걸을 때 편리하고 동작도 기민해지는 효과가 있어서 인도 여행에서 사 가지고 온 것이었다.
노인은 손을 저으며 '이 좋은 물건'을 사양하다 말고, 그제서야 나는 노인의 등에 볼품없는 배낭을 짊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는데, 문득 배낭을 내려 주섬주섬 안을 뒤적이더니 뜻밖에도 난초 두 뿌리를 꺼내서 내게 건네주는 것이었다. 꾀죄죄한 배낭 안에서 신비한 난초가 꺼내지는 순간 나는 마술사 앞에서 입을 벌리고 선 어린아이처럼 되고 말았다. 노인의 말로는 그것이 춘란(春蘭)이라는 것이었다.
아무 이유도 없이, 내가 그에게 베푼 별다른 호의도 없이, 그저 산길에서 마주쳐 몇 마디 다정한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사실만으로 나는 섬노인에게서 난초 두 뿌리를 얻었다. 얼굴이 붉어진 나는 고맙다는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노인과 헤어졌다.
그 난초는 그후 오랫동안 내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사람들은 난에 대해, 정확히는 난의 기품과 은은한 향기에 대해 찬사의 말을 아끼지 않지만 나는 난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게 없다. 난의 향기에 딱히 젖어 본 적도 없고, 까다롭다는 그 성미 때문에 지레 겁을 먹고 화분 하나 들여놓지 못했었다. 다만 나는 난의 그 가느다란 줄기와 고요한 곡선, 아침꽃처럼 피었다가 저녁별처럼 지는 그 꽃이 좋았다.
특히나 노인이 준 춘란을 화분에 담아 책상에 올려 놓고, 어쩌다 그것을 바라보면 나 줄기 뒤켠에 우두커니 선 그 꾀죄죄한 노인의 영상이 어른거리고, 내가 쫓아가던, 주로 이 섬에 많이 산다는 그 왕나비의 모습도 그의 머리 너머로 그림자처럼 비치곤 했다. 제주 왕나비는 한국산 나비 중에서 가장 먼 거리를 이동하는데, 태백산맥 줄기를 타고 원산 부근까지 날아가기도 한다. 같은 왕나비과에 속하는 것으로 북미 대륙에 사는 모나코나비는 거대한 무리를 지어 남쪽을 향해 수천 킬로미터를 여행하기도 한다. 그 긴 여정에서 수많은 나비떼가 파도에 휩쓸려 죽지만, 모나코나비는 그 여정을 마다하지 않는다. 나비학자도 아직 그 이유를 찾아내지 못했다.
어렸을 적 내가 체험한 최초의 명상 --- 명상을 작은 세계(小我)의 눈뜸이고 열림이라고 간단히 정의한다면 --- 은 햇빛이 환한 봄날 툇마루에 앉아 새로 이파리를 피운 나뭇가지와 꽃줄기 사이로 날아 다니는 나비를 바라봄이었다. 평면적이던 뜰에 나비가 펄럭거리며 날아오면 갑자기 입체감이 살아나고, 그 날개짓을 뒤쫓는 내 시선은 금방 아득해져서 나는 곧장 시간도 공간도 없는 무차원의 세계로 가버리곤 했다. 나는 더 이상 현실 속의 한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인간이 아니었다. 현실은 다른 초월적인 세계로 뛰어넘기 위한 뜀틀같은 것이었다. 나는 일찍이 희망과 고통이 사라진 세계를 엿보았던 것이며, 눈에 보이는 세상 너머에 또다른 세상이 존재함을 알았던 것이다.
나비를 향한 그러한 엿보기는 내 인생을 결정지웠다. 그때부터 나는 나비가 지닌 어떤 힘을 믿게 되었다. 헤세의 '나비'에 후기를 단 폴커 미켈스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부처도 그의 마지막 설법에서 고향의 나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고 하지 않은가?
"나의 스승 그대에게 감사드린다오. 나는 바라문교의 경전에서 보다 그대에게서 더 많은 걸 배웠다오."
나비가 지닌 힘이라는 것은, 눈부신 찰나의 순간들 속에 깃든 영원성을 가리키는 힘이다. 찰나의 순간들은 손 안에서 부서져 버린다. 영원은 그 너머에서 미소짓고 있다. 나비의 날개가 은빛 가루로 뿌려져 있는 것은 따라서 전혀 우연이랄 수 없다. 그러한 매혹에 이끌림이 어디 나만의 일이랴. 나비는 이미 기원전 1,500년에 그려진 파라오의 무덤 벽화에도 등장하고 있으며, 기원전 1,300년경 미케네 제후의 무덤들에게서도 금장식의 나비가 출토되고 있음을 눈여겨 봐야 한다.
대학교를 다닐 무렵 내가 사랑했던, 헤어지고 나서 여러 세월이 흐른 뒤에도 여전히 내 영혼과 하나인 채로 남아 있는 그 여인도 작은 나비 브로우치를 즐겨 웃옷 깃에 달고 다니곤 했다. 가느다란 철사로 더듬이까지 만들어져 있는, 어떤 때는 블루의 빛깔로, 어떤 때는 붉은색에 보라빛이 섞인 보석 박힌 것으로 내 시선을 묶어 두었었다. 어렸을 적 나비와 연결되었던 내 존재의 체험을 젊은 시절에 와서 다시금 일깨운 것은 그녀였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벌과 나비가 식사를 하고 있는 5월의 숲을 거닐면서 많은 것을 이야기했었다. 페르시아의 문학작품과 부처의 사상을 논하기도 하고, 우리가 아직 이해하지 못했던, 그리고 그 이후로도 끝내 이해할 수 없었던 복잡한 철학 사조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다만, 그러한 것은 이제 얼마나 아득히 멀어졌는가? 우리는 우리의 어깨 위에서 어른거리던 나비떼는 여전히 내 곁에 있음을.
섬에 이사와서 처음 맞이한 봄의 대부분의 시간을 그렇게 나는 나비 쫓기에 열중하면서 지냈다. 어떤 때 나는 정신이 나간 미친 여자처럼 너훌너훌 펄럭이며 나비를 쫓아다니기도 했고, 어떤 때는 서쪽 바닷가로 떨어지는 붉은 낙조를 배경으로 나비의 실루엣이 춤추며 지나가는 것에 넋을 놓고 앉아 있기도 했다. 그러니 섬 주민들이 나를 어떤 눈으로 바라보았을까는 상상이 가고도 남는 일이다. 큰 키에 여자처럼 장발을 한 낯선 남자가 산으로 들로 쏘다니는 모습을 보고서 그들은 내가 '많이 아픈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다. 많이는 아니더라도 가끔씩 나는 아팠다. 나비를 쫓아 다니는 일은 따로하고, 그해 봄부터 여름까지 중간중간에 나는 갑자기 살아가는 일이 힘들고 자신이 비참해지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특별한 어떤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생의 절망이나 막막함은 습관처럼 우리를 방문한다. 더구나 그럴 때는 날씨도 찌뿌둥해서, 바다와 하늘이 온통 회색 빛으로 그 경계선을 구분하기도 힘들었으며 배들은 한없이 느릿느릿 수면 위를 기어다녔다. 그런 날은 나비도 허공을 날지 않았다.
내가 앓고 있는 병은 답답한 일상 때문이거나 존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지혜의 결핍 때문이 아니었다. 나는 이미 많은 자유를 누려온 터였고, 또한 동서고금의 지혜로 머리가 꽉 채워진 볏집인형과도 같았다. 그래서 머리 속이 부시럭거렸다. 그냥 나는, 어서 빨리, 생을 내 움켜진 손아귀에서 모두 놓아 버리고 싶었다.
죽는다는 것은 육체를 이루고 있는 원소들이 흙의 원소로 환원된다는 것을 뜻하지만 내가 말하는 죽음은 육체의 죽음이 아니다. 정신의 죽음도 아니다. 그것은 어느 노사(老師)가 말했듯이 '우리는 죽는다. 그러면 죽지 않는다'의 의미다. 산스크리트어의 수냐(空)가 그 뜻이다.
나비가 나를 끌어당기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것이 갖고 있는 생의 집착에의 초연함이다. 가볍게 비상하는 그 초연함이 생의 무거움을 지탱해 주고 있다. 앞서 말한 헤세의 책에서 시인 헬무트 폰쿠베가 '동물소묘집'에서 묘사한 나비의 비사회성, 그리고 비사회적인 것으로 보이는 것의 유용성이 이렇게 인용되고 있다.
"꿀벌은 부지런히 잉잉거리고, 개미는 달리고 먹이를 잡아당긴다. 딱정벌레는 무겁게 발버둥치고, 구더기는 땅을 파고 구멍을 뚫는다. 모두가 큰 목적을 가지고. 그러나 나비는 아무것도 계획하지 않는다. 그것은 어디선가 흔들거리며 꿀을 빨고 그러다가 잔잔한 바람에 밀려 높이 솟구쳤다가 다시 새로이 유희적인 날개의 율동으로 내려앉는다. 신이 의도한 바로 그 순간처럼. 고슴도치는 쥐와 십자독사를 잡아먹는다. 우러러볼 만한 놈이다. 암소는 뿔에서 발굽까지, 우유에서 분뇨까지 다 유용하다. 이 얼마나 존경할 만한 동물인가! 그러나 나비는 꽃에서 꽃으로 날아다니며 꿀을 모으지 않는 빈둥거리는 방랑자다. 지구는 그 산맥과 코끼리, 얼음과 납을 지녀 힘있고 무거우며 거칠다. 그러나 나비가 없다면 견딜 수 없을 것이다. 단 한 마리의 나비는 지구의 무게를 지탱한다. 무거운 모든 것, 모든 물질, 이것들은 나비의 모습 앞에서 무(無)로 변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나비가 꿀을 탐닉하는 곤충이면서도 벌처럼 꿀을 모으고 저장하거나 하나의 공동 목표를 위해 무의식적인 집단생활을 하는 데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나비는 꽃 위에 앉아 잠시 입술을 적시곤 곧 날아갈 뿐이다. 그것은 이 생의 유한성에 대한 가장 암시적인 표현이다.
서울을 떠나 섬으로 이사오면서 못내 아쉬웠던 것은, 내가 짐을 꾸릴 무렵 어느 과학관에서 열린 '한국의 나비 전시회를 구경하지 못하고 그냥 내려온 일이었다. 그것을 꼭 보러 가려고 일시와 장소를 메모해 벽에 꽂아 놓기까지 했는데, 갑작스런 이사 일정에 사람들과의 작별인사가 줄을 이어서 그만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집을 먼저 배편으로 부치고 이틀 뒤 비행기에 몸을 실었는데, 비행기 안에서 문득 그 나비 전시회가 떠올라서 가슴이 허전했다. 그러면서 내가 드디어 모든 걸 뒤에 남겨두고 떠나게 되는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고독감이 밀려왔다.
그러나 이곳 산과 들녘의 나비가 곁에 있기 때문에 나는 더 이상 고독하지 않다. 생의 근원적인 고독감이 밀려와도 나는 그것을 깊숙이 감출 수 있다. 때로 감추는 것은 더없는 미덕이다. 우리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명제 앞에선 더욱 그렇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진흙으로 만든 차가운 탈을 얼굴에 쓰고서 그 감정을 뒤에 숨기지 않았던가.
1926년 1월의 편지에서 헤세는 "나는 나비나 그밖의 덧없는 아름다움에 대해 늘 어떤 관계를 지녀왔다. 반면에 지속적이고 확고한, 이를테면 견고한 것과의 결합에서는 늘 실패했다."라고 쓰고 있다. 그러나 나로 말하면 나비를 통해 덧없는 아름다움의 그 덧없음을 성찰하고, 결코 땅 위를 기어다니지도, 그렇다고 드높이 날지도 않는 중용의 도를 깨우쳤다. 그럼으로써 나는 나 자신을 생의 절망과 희망의 중간에 붙들어 매는 법을 배웠으며, 나비가 날아 다니는 봄날만큼이나 짧은 생에서 찰나적인 순간 속에 깃든 영혼을 향해 한 걸음 다가가고자 했던 것이다.
[3] 바다를 바라보는 오후 (131~132쪽)
어떤 사람은, 문학가란 늘 심각하고 고뇌에 찬 인간이라고 상상하는 버릇이 있다. 물론 그러한 작가가 있긴 하다. 그리고 남에게 그런 작가로 보이려 애쓰는 사람도 있다. 더구나 평론가들은 얼토당토 않는 어려운 말로 자신의 식견을 자랑하고 작가 위에 군림하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평론은 독자로 하여금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어렵다. 그들은 그렇게 써야만 훌륭한 평론이라고 생각하는 모영이다. 생물학자들은 마땅히 '평론가'라고 자처하는 이들의 진화 개통수를 연구해야 할지도 모른다.
집으로 배달된 신간서적들과 평론집을 읽다 말고 오후가 되어 나는 바다로 나갔다. 바라도 내려가는 길 양쪽 밭에는 가을 열매들이 황금빛 색조를 빛내고 있었다. 10월의 햇살이 마지막 과즙을 채워 주기 위해서 열매들 위로 떨여져 내리고 있었다. 나는 한가로이 들길을 걸어나가 절벽 끄트머리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바람은 고요하고 근처의 작은 섬들이 햇살에 반짝였다.
섬에서 바라보는 바다는 구름 때문에 더욱 정취가 있다. 멀리 수평선 위로 떼지어 구름들이 솟아오르고, 그 아래로 가물거리며 배 한 척이 지나간다. 어떤 구름은 외따로 떨어져서 동동 떠가고 있다. 구름이 없는 날은 물빛과 하늘빛이 닮아서 바다는 거대한 호수처럼 보인다.
폭풍이 섬 근처를 지나가는 날이면 온갖 크고 작은 배들이 섬기슭으로 돌아와 닻을 내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 날은 파도가 절벽을 삼켜 버리기 때문에 서둘러 집으로 돌아와야 한다.
바다를 바라보고 앉아 있으면 시간이 정지한 듯하다. 밀물과 썰물의 운동이 알려 주는 시간의 흐름이 있지만 그것은 시계의 시간과는 다르다. 무엇인가 마음을 꽉 채운 듯하고 한편으론 마음 안에서 모든 것이 빠져나간 듯하다.
나 또한 한때는 고뇌에 찬 생에 익숙해 있었고 그것을 문학가의 특권으로 여긴 적도 있었으나, 오후의 바닷가에 나와서 앉아 있으면 그러한 시절이 아득하게만 느껴진다. 나는 이곳에 와서 여러 해만에 평온한 느낌 같은 것을 되찾았고, 비로소 사물을 그 속깊은 곳까지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오후의 바다에 앉아 정신의 충만함과 함게 어디선가 사색의 꽃잎이 한 겹씩 떨어지는 것을 체험하게 되었다.
[4] 무지개 같은 나날 (133~136쪽)
한 인간을 만나기 위해 그 먼 길을 간다는 것은 큰 결단을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더구나 날로 거대해져 가는 도시의 덩치가 싫어서 섬으로 이사온 나로서는 단 하루일지라도 또다시 그 속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마음 내키지 않았다.
그러나 가야만 했다. 이 세상과 작별하기 전에 그녀를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만나리라.
비행기 예약을 하고, 별 채비도 할 것 없이 나는 입고 있던 옷 그대로 공항으로 향했다. 섬을 가로질러가는 횡단도로 주변은 온통 여름 일색이었다. 하늘은 맑고, 아침 대기 속에 새들이 한가로이 날고 있었다. 봄꽃은 져서 여름의 야생화들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아직 어린 얼굴로 햇살을 응시하고 있는가 하면, 어떤 열매는 벌써부터 붉은 색조를 띄고 있었다.
자연은 놀라운 생명력으로 해마다 어김없이 되살아난다. 인간이 파괴하지 않으면 그 재생과 재귀(再歸)에는 변함이 없다. 어느새 정이 든 그것들을 뒤로 하고서 비행기는 투명한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공중에서 내려다보는 섬은 외로워 보이지 않는다. 파도가 흰 물결을 일으키며 기슭에 부서지고, 멀리 있는 또다른 섬들이 교신을 보내고 있다. 다른 섬이 주위에 없더라도 바다에 홀로 떠 있는 섬은 그 자체로 자연이 간직한 순수와 빛으로 반짝인다. 섬에 와서 몇 달 지내는 동안 내가 배운 것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순수는 죽지 않는다는 것이다. 죽었는가 싶으면 어김없이 되살아나고, 얼어붙은 흙 속에 갇혔는가 하고 들여다보면 금방 이마로 흙을 밀치고 재귀한다.
서울에 도착한 나는 그녀를 만나기 위해 몇 시간 동안 자동차들의 대홍수 속을 지나가 강남의 압구정동까지 가야만 했다. 그녀는 화가이며, 지금 그곳의 어느 화려한 전시관에서 작품전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왜 화가들은 한적한 들판이나 오솔길에서 전시회를 열지 않는 걸까? 태양빛에 그림의 색이 바랠 것을 염려해서일까, 아니면 새들이 작품을 버려 놓을까 봐 걱정되기 때문일까?
그러나 어디서 전시회를 열든 무엇이 중요한가? 이번이 그녀의 마지막 작품전인 것을. 그녀는 아직 40대인데도 암에 걸렸으며, 수술을 거부했고, 그래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녀가 좋아한 인도여행, 이태리 가곡들, 집 뒤의 그늘 깊은 나무, 이 모든 것들이 얼마 후면 무(無)로 사라지리라. 한 인간이 이 세상에 존재했었음을 증명해 줄 만한 것이 과연 몇 가지나 되겠는가? 실존주의 작가 까뮈는 이렇게 토로한 적이 있다.
"무엇이 우리의 존재를 증명해 줄 것인가? 우리의 작품인가, 아니면 대체 무엇인가? 단지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그러나 사랑은 침묵이다. 우리는 모두 남모르게 죽어간다."
그녀가 그린 미술작품들도 곧 먼지가 묻고 곰팡이가 뒤덮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삶은 몇 사람의 기억 속에서 색이 바래져 갈 것이다.
전시회가 열리는 화랑에 도착해서 5분도 채 지나지 않아 나는 그곳 풍경이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형식적인 인사와 미소, 겉치레, 인위적인 조명, 패션쇼를 무색케 하는 화려한 옷차림들과 그 속에 숨은 나약한 몸뚱이들. 모두들 벽에 걸린 그림은 제대로 감상하지도 않고 아는 체 하기에 바빴다. 그런 다음에는 차려진 음식 테이블로 서둘러 자리를 옮겨가는 것이었다.
그 와중에서 나는 화사하게 차려입은 그녀를 만나 악수를 하고 전시회를 축하했다. 그녀는 나의 섬 생활의 안부를 물었고, 나는 그녀의 작품에서 전에 없이 드러나는 생명과 자연에 대한 친밀감을 이야기했다. 내가 보았던 한두 해 전의 작품들과는 달리 선이 굵어지고 생동감이 뚜렷해졌다. 그녀는 내가 먼 길을 와 준 것에 대해 고마워했고, 나는 그녀의 얼굴을 본 것만으로도 그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그밖에 우리는 더 할 말이 없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리고는 뒤이어 또 한 떼의 양복 입은 사람들이 밀려들어와 그녀는 그들에게로 갔다. 트럭이 화환을 실어나르고, 그녀의 남편과 친분이 있음직한 국회의원도 등장하고, 영화감독들도 나타나고, 그녀의 자필서명이 담긴 전시회 작품집을 받아든 사람들은 여기저기 모여 서서 미소 섞인 정중한 대화들을 나누고 있었다. '자연예찬'이라는 제목이 붙은 이 전시회를 한적한 들녘이나 산의 오솔길에서 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나는 다시금 생각했다.
아닌 게 아니라 벌써부터 나는 자연의 친구들이 그리웠다. 이파리 뒤에서 부산을 떨고 있는 나방이와 속도를 제어하지 못하고 나무둥치에 이마를 찧어대는 딱정벌레, 태풍이 몰려와도 느리기만 한 지렁이, 경보 챔피언인 자벌레. 그래서 저녁에 전시회 기념 회식이 있으니 꼭 참석해 달라는 그녀의 청을 마다하고 나는 서둘러 비행기를 타고 자연의 친구들에게로 돌아왔다.
하루만에 다시 찾아온 섬은 따뜻하고 편안했다. 나는 다시는 이 곳을 떠나 도시의 건물들 속으로 들어가지 않으리라 스스로 다짐했다. 누가 떠나든 죽든.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난 후에 나는 다시 서울에서 걸려온 전화 한 통을 받았다. 그녀의 목소리였다. 그녀는 놀랍게도 기쁜 소식을 전해 주었다. 전시회를 마치고 나서 다시 진찰을 받았는데 암이 기적적으로 자연 치료되었다는 것이었다. 의사도 놀랄 만큼 정상으로 회복되었다고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전했다.
나를 감동시키는 것은 자연의 이 변함없는 재생과 재귀의 힘이다. 그 힘 앞에서 나는 늘 삶의 의지를 되찾는다. 인간 역시 자연에서 제외되지 않는다. 누구나 소멸하지만, 완전히 소멸하기 전까지는 끝없이 재생한다. 비 온 뒤 바다 위에 나타나는 무지개처럼. 나는 그녀의 얼굴을 다시 볼 수 있게 되었음을 기뻐했으며, 다음 번에 전시회를 열면 그때도 꼭 참석하겠노라고 그녀에게 약속했다.
[5] 거미에게 말을 가르치며 (168~171쪽)
여름이 거미의 계절이라는 것을 부인할 곤충과 날벌레는 없으리라. 나뭇가지와 전신주와 건물의 모퉁이마다에서 날벌레들은 한숨지으며 거미줄에 걸려든다. 어쩔 수 없는 일인 것이다. 그러면 거미란 놈은 냉정하게 달려와서 숨통을 끊어 놓는다.
거미는 제 속의 것을 뱉아 집을 짓는 거의 유일한 곤충이다. 그리고 그 집 자체가 하나의 사냥터요 생계수단이다. 자기의 옛집에 돌아와 사는 거미는 없다. 날개 달린 벌레를 포획하기 위해서는 빈틈없이 지어진 새 집이 필요한 것이다.
한번은 산길을 걷다가 삼나무 그늘에 집을 짓고 사는 왕거미를 발견하고 자세히 관찰한 적이 있다. 자루처럼 생긴 엉덩이에 노란색 줄무늬를 한 그 거미는 장인의 솜씨를 유감없이 발휘한 거미줄 한구석에서 정지한 듯 기다리고 있었다. 거미가 날벌레의 자태나 날개를 사랑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그 살[肉]과 수분을 탐낼 뿐이다.
나는 옆의 나무에서 작은 이파리를 떼어 거미줄에 재빨리 던져 보았다. 그러나 거미는 속지 않았다. 미동도 하지 않고 긴 다리로 엎드려 있는 것이 마치 수도승의 자세와도 같았다. 이번에는 나뭇가지 끝으로 거미줄 한가운데를 진동시켜 보았지만 거미는 여전히 자세를 흐뜨리지 않았다. 나 역시 포기하지 않고 입으로 바람을 불어 거미줄을 떨게 했다. 몹시도 무더운 여름날에 그렇게 나는 한참동안 거미와 어린아이같은 씨름을 계속했다. 그러나 결국 패배한 것은 내 쪽이었다. 거미의 요지부동한 인내와 뜨거운 태양빛을 견딜 재간이 없었던 것이다.
밀짚모자로 해를 가리고 나는 두세 시간 동안 좁은 산길을 걸어 다녔다. 걷는 것을 싫어하는 내 성격은 섬으로 이사 와서 많이 달라져, 이제는 하얗게 달아오르는 여름의 열기 속도 마다하지 않고 돌아다니게 되었다. 어떤 때는 태양이 너무도 강렬해서 시골집의 회벽이 다 부스러질 것만 같고 걸음을 옮기기가 힘들었지만 나는 지도제작자처럼 작은 물통 하나만을 들고 세 시간이나 산책을 했다. 삼나무 그늘에 서 있어도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런데 돌아와서 보면 거미는 아직도 그 자리에 그대로 매달려 있는 것이었다. 대기가 뜨거우니 날벌레도 돌아다닐 리 없었다. 노란 왕거미는 숫제 시간을 잊은 듯 무념의 상태에 몰입해 있었다. 거미줄말고는 달리 집이 없으니, 나처럼 서늘한 집안으로 피해 들어갈 수도 없으리라.
그러나 서늘한 저녁은 이내 찾아오고 날벌레들은 몸이 근질거려서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대지 위로 날아오른다. 그러다가 거미줄에 덜컥 걸려 버리고, 거미는 한낮의 인내에 보상을 받는다. 그보다 더한 보상이 어디 있겠는가? 거미는 꿀을 원하지도, 재산 증식을 꾀하지도 않는다. 날벌레 몇 마리만으로도 충분하다.
이태리에서는 있는 듯 없는 듯한 사람을 거미같은 사람이라고 부른다. 없는 듯하지만 고개를 돌려 쳐다보면 거미는 나뭇가지 사이의 허공에 거미줄을 치고 매달려 있다. 또한 있는 듯하지만 다시 쳐다보면 거미줄을 늘어뜨리고 바람의 힘을 받아 다른 곳으로 가 버린다. 나 또한 이 지방에 이사와서 거미같은 나날을 보냈다. 못견디게 열정적이거나 정신을 몰입할 만한 날들도 아니고, 그렇다고 바닥을 헤맬 정도로 감정이 가라앉은 날들도 아닌, 있는 듯하면서 없는 듯한 거미와 같은 나날들을 보냈다. 정신은 한가롭고, 딱히 큰 기쁨이나 슬픔같은 것은 없었다. 다만 있는 듯하면서 없는 듯한 시간들이 나는 좋았다.
겨울의 여러 달 동안을 잊고 있다가 여름이 찾아와서 나뭇가지의 거미를 발견할 때면 나는 언제나 그 재귀(再歸)에 놀라고 감동 받는다. 겨울 내내 나는 협소한 방에서 책을 읽는 것으로만 시간을 보낸다. 방의 사면이 책으로 빽빽이 들어차 있는데도 새로운 신간서적이 하루도 거르지 않고 밀려든다. 신문사와 잡지사가 인터뷰 요청을 해오고, 전화는 쉬지 않고 울려댄다. 내가 없는 동안에도 독자들이 집을 들락거리고, 강연회 기획자가 시간표를 들이댄다. 저녁 초대는 지루하기 그지없다. 그럴 때마다 나는 어서 빨리 겨울의 답답한 시간들이 지나고 나만의 시골로 도망쳐 고요히 공중의 거미를 응시하게 될 날을 기다린다. 떠들석한 대화와 담배연기 속에서도, 내가 작년에 보았던 그 거미가 다시 그 자리에 돌아와 새 집을 짓는 것을 머리 속으로 연상한다.
거미가 갖는 어두운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누군가 나에게 "날개도 없이 공중에 매달려 있는 거미는 행복한가?"라고 물었을 때 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이 꼭 나 자신을 두고 하는 말처럼 들렸다. 나는 날개도 없이 허공에 매달려 있지 않은가.
거미가 나에게 가르쳐 준 것과 가르쳐 주지 않은 것을 나는 생각한다. 나 역시 거미처럼 허공에 매달려 절대를 꿈꾸었으나 바람에 떠밀려가는 모래처럼 어느새 방향없이 가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미와 나는 약속을 지켰다. 시간을 보내기로 한 이 생의 약속을. 그런 다음 신은 거미에게 불멸을 약속했으나, 여름도 가 다기 전에 거미는 껍질만 남고 거미줄도 폐허의 궁전으로 변한다. 거미의 눈에 시간이 지나가며 적어놓는 말들을 내 눈은 읽지 못한다. 거미의 눈과 내 눈은 둘 다 영원을 보았으나 우리의 육신은 순간 속에 부서지고 만다.
나는 거미 예찬론자가 아니다. 다만 거미에게서 생의 고독과 유한함, 그리고 그것을 지켜보는 자기응시를 발견하고서 그것을 내 시의 한 소재로 삼을 뿐이다. 또한 거미로부터 그 변함없는 재귀의 생명력과, 있는 듯하면서 없는 듯한 존재방식을 배운다. 허공에 매달린 거미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내 삶의 많은 문제가 풀렸다. 나도한 거미가 자기집을 짓고 살듯이 지상에다 내 집을 지었으며, 꼭 그만큼이나 미련없이 집을 허물어야 한다는 이치를 깨닫는다. 거미뿐 아니라 내가 쓴 시도 곧 사라지고 마는 것, 그러나 살아 있는 날들 동안 나는 내 시에 걸려들 독자들을 기다리고 있는 거미와 다를 바 무엇인가!
[6] 비가 전하는 소식 (184~191쪽)
법정 스님.
다시 여름이 왔습니다. 며칠동안 풀과 나무를 적시던 장대비도 멎고, 오늘은 구름 틈새로 다시금 여름의 태양이 내리비치고 있습니다. 비가 내리는 동안 저는 내내 산의 움막에서 지냈습니다. 아무 할 일 없이 비를 구경하거나 감자를 구워 먹으면서 생의 한때를 보냈습니다.
비가 그쳐 움막 밖으로 나갔더니 그새 풀들이 많이 자라 산의 오솔길은 전보다 좁아지고, 풀줄기 아래선 벌레들이 무척 부지런해졌습니다. 이제 가을을 대비해 더 많은 식량이 필요할 것 것입니다. 다리가 여럿인 벌레도 있고, 딱딱한 껍질에 모래알 만한 눈을 가진 놈도 있습니다. 어떤 놈은 겨울도 아닌데 털복숭이 옷을 잔뜩 껴입고 있습니다.
이번 여름비는 저에게도 몇 가지 선물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무엇보다도 혼자 있는 시간과 벗할 수 있었고, 인간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었습니다. 꺼진 불 속을 뒤적거려 불씨를 하나 찾아내서는 그것으로 다시 불을 지펴 빗소리와 함께 새벽녘이 될 때까지 앉아있곤 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산의 움막에서 감자와 친해질 수 있었던 것이 가장 큰 수확입니다.
이번 여름에는 다른 어느 때보다도 비를 기다리는 마음이 다들 컸습니다. 봄가뭄이 오래 이어진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사람 사랑아가는 일이 힘들어지고, 그 정신이 가물어진 탓이겠지요.
그러나 아무리 가문 날에도, 움막 아래의 골짜기에 가보면 비록 물은 흐리지 않지만 그것이 아주 말라죽은 게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돌 밑에서는 물소리가 들립니다. 노자(老子)가 말한 '곡신불사(谷神不死)'가 생겨납니다. 우리의 생명력인 계곡의 물(谷神)은 결코 죽지 않음을 이곳에 와서 새삼 느낍니다. 죽은 듯하지만 다시 살아나고, 오랜 가뭄 끝에도 며칠 동안의 비에 또다시 푸르러질 수 있는 저 힘은 '불사'의 경지를 넘어서 생의 근본원리 자체임을 이 여름은 일깨워 줍니다.
다시 여름이 오고, 이곳 제주도의 산과 바다 역시 본래의 제 풍광(風光)을 되찾아, 이제는 모든 것이 파랗고 강렬합니다. 도회지를 떠나 이곳에 와서 지내니, 때로는 모든 사물의 빛이 처음 보는 것처럼 분부실 적이 많습니다. 특히 이곳의 구름과 산오름들은 한 순간이라도 자연의 침묵 속으로 침잠하는 경험을 안겨 줍니다. 이 경험은 열에 들뜬 도회지의 어떤 즐거운 일보다 세상과 저의 거리감을 지워 줍니다. 많은 것이 이곳에서는 빛을 발합니다 여럿 중의 하나일 뿐인 나뭇잎, 하찮은 게딱지, 구멍 뚫린 돌들, 의심 많은 까마귀, 그것들 모두가 빛 자체로 넘쳐납니다.
또 처음 가보는 오솔길들은 언제나 저를 유혹합니다. 가지를 늘어뜨린 양쪽에 줄지어 서 있고, 길 끝에는 바다가 있습니다. 해변의 묘지로 통하는 길이 있습니다. 이름이 적혀 있지 않은 무덤들이 해풍에 소금기를 뒤집어 쓰고서 바다와 마주보고 누워있고, 눈이 둥근 새가 이리저리 날아다닙니다. 어떤 길은 아름답지도 않고 그냥 다른 길로 이어지기만 할 뿐이나 편안함과 한적함을 갖고 있습니다. 이 많은 길을 쏘다니다가 피곤에 지쳐 돌아오지만 저는 그 어느 때보다 건강합니다.
이곳에서 저는 어느날 창문으로 날아들어온 딱정벌레 한 마리와 함께 생활하고 있습니다. 금빛의 등 빛깔을 한 놈인데, 도무지 제 방을 떠나 자연의 품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고독할 때 그것은 친구가 되어 주고, 아침 산책 때는 어깨에 올라앉아 따라나서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저를 제 자신에게로 한 거름 다가서게 해줍니다.
섬에 저녁이 찾아와,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회의의 목소리가 제 안에서 들려올 때면 저는 딱정벌레를 곁으로 불러 위로를 청하기도 합니다. 놀라움으로 생을 바라보는 순간은 짧고, 더 많은 불안정안 순간들이 밀려오는 것을 섬에서 생활하는 저이지만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딱정벌레는 이렇게 말합니다.
"삶은 고통이에요. 고통으로부터 달아나려고 하기 때문에 삶은 두 배로 고통스러운 거예요. 나를 보아요. 나는 딱정벌레이고, 꽃이고, 저 하늘이에요. 또 저 의자예요. 가장한 모습의 나를 알아보지 못하시나요? 당신은 자기가 인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를 딱정벌레라고 여기는 거예요." [註 : 장 그르니에 '고양이 물루' 중에서]
금세 사라지는 저녁빛 다음에는 평온한 밤이 찾아옵니다. 한번은 밤바다를 바라보며 어두운 절벽 위에 앉아 있다가 발을 헛디뎌 아래로 굴러 떨어졌습니다. 무릎에 상처를 입고 손목에 금이 가는 부상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절벽에서 떨어져 바닥에 몸이 부딪치는 순간 저는 이상하게도 죽음의 두려움보다 '세계가 나에게 열렸다.'는 한 문장이 떠올랐습니다. 저는 딱정벌레가 일러준 대로 바닷가 기슭의 대지에 몸을 맡기고 오래도록 누워 있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이 곧 당신이었다는 사실을 당신은 알지 못하나요? 육체 속에, 영혼 속에 있는 것은 언제나 당신이었어요. 이 세계 안에서 당신은 당신에 대한 증거를 물었어요. 그러나 이제 당신은 이 세계 전부가 당신이었다는 것을 깨달았군요." [註 : 회교 신비주의 시인 잘랄루딘 루미의 시]
바닷물이 저의 귓전에까지 와서 속삭이고, 갈매기의 울음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왔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생과 사의 수로(水路)를 미끄려져간 무수한 영혼들의 속삭임이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 대지에 왔다가 그림자를 몇 번 어른거리다가는 사라져간 짧은 인생들이 들려주는 말.
이곳에 와서 있으니 세상 소식을 비가 전해 줍니다. 스님이 계신 그곳 불일암에는 더 많은 물이 골짜기를 흘러내리고 풀대궁은 더 높이 얼굴을 내밀었겠지요. 이태전 여름 그곳에서 스님을 뵈었는데, 벌써 두 번의 여름이 지나갔습니다 그 무렵 스님께선 인도 여행에서 돌아오신 다음이었고, 작년에는 유럽에도 다녀오셨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유럽 여러 나라의 사원에도 다니시고, 사람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신 것으로 압니다. 그리고는 돌아오셔서 한동안 강원도 화전민촌의 빈 집에 들어가 생활하신다는 것을 송광사 청학스님으로부터 전해 들었습니다.
저 역시 두 차례 인도를 다녀온 뒤 작년 여름, 문단에 데뷔한 지 십년만에 첫시집을 냈습니다. 스님께서도 그 시집을 읽으시고 사람들에게 권해 주셨다니 기뻤습니다. 가끔 스님 계신 곳을 찾아 뵐까 했었으나, 수많은 사람들이 스님의 시간을 빼앗는데 저까지 그 홀로있음을 방해하면 안 될 것 같아서 그만두었습니다. 그냥 비와 바람이 전하는 소식을 들으시겠지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후 저는 생활이 갈수록 어지러워지고 마음의 순수함으로부터도 멀어지는 듯해서, 마침내 올 봄에 서울을 떨쳐 버리고 이곳 제주도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처음에는 네팔로 갈 생각이었는데, 여러 가지가 여의치 않아 도중에 그만두게 되었고, 그럴 즈음 이 섬의 눈부신 자연이 저를 손짓해 부른 것입니다. 이러한 저의 소식 역시 비와 바람이 전하는 말을 통해 스님께서도 들으셨겠지요.
어느핸가 스님께서 수필집에서 '유교경'의 한 구절을 들려 주신 기억이 납니다.
"고요하고 자취없는 안락을 얻고자 한다면 안팎의 시끄러움을 떠나 홀로 한가로운 곳에 머물라. 마음 속의 온갖 사념과 바깥의 여러 대상을 버리고 한적한 곳에 홀로 있으면서 괴로움의 근본을 없애려고 노력해야 한다. 무리를 좋아하는 사람은 무리로부터 괴로움을 받는다. 약한 나무에 많은 새떼가 앉으면 그 가지가 부러질 염려가 있는 것과 같다. 이것을 가리켜 멀리 떠남이라 한다."
이곳에 와서 저는 일도 쉬고, 가끔 시집을 읽는 것 말고는 책 읽는 일도 쉬고, 사람들과의 관계도 잠시 쉬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을 점검하는 일도 쉬고 있습니다. 새삼 말할 필요도 없이, 쉬는 것이 저에게는 최고의 수행입니다. 적어도 이곳에 와서 그렇군요. 어떤 일들은 수행을 자지 점검으로만 알아 끝없이 자신을 괴롭히기도 하지만, 이곳에선 그러한 일이 필요없어 집니다. 눈을 뜨고서 풍경을 고요히 바라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밤에 산길을 지나가면 이곳에선 놀랍게도 뿔달린 야생노루가 나타납니다. 얼굴을 먹물에 빠뜨린 것처럼 새카만 어린 새끼도 있고 제법 큰 놈도 있습니다. 어떤 놈은 왕관처럼 우아한 뿔을 머리에 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반딧불떼가 마치 바람이 쓸고 지나가듯이 숲의 풀섶에서 일제히 커졌다가 꺼지곤 하는 장관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날 반딧불들이 펼쳐 보이는 그 깜박거림의 한가운데에 앉아 있었더니 동행했던 사람 하나는 그만 울음을 터뜨리는 것이었습니다. 자연의 순수함이 주는 감동을 참을 수 없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사람이 모여 사는 산 아래쪽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뿔달린 노루도 내려오지 않고 반딧불은커녕 따뜻한 불빛 하나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삶의 황폐함 그 자체입니다. 언제나 놀라는 사실이지만, 사람의 손길이 닿으면 모든 것은 금방 때묻고 파괴되어 빛을 잃어 버립니다. 건설과 개발이라는 이름 아래 이 작은 섬에서도 숲이 파괴되어 오락시설이 들어서고, 불사(佛事)라는 미명 아래 아름드리 나무를 잘라내어 절을 짓는가 하면, 더러운 물이 바다로 그냥 흘러내려가 물고기들을 죽게 합니다.
그래서 노루와 반딧불은 산 위쪽으로 내몰려 겨우 생명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달팽이도 맑은 이슬을 찾아 계곡 깊은 곳으로 숨어 버렸습니다. 머지않아 저 불사(不死)의 곡신마저 말라 버릴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자연의 일만이 아닙니다. 사람의 손길은 자연뿐 아니라 사람 자신까지도 마구 파괴하고 상품화하여, 그 순수성은 아주 깊은 곳으로 내몰린 채 겨우 숨을 쉬고 있습니다. 이제는 제대로 숨을 쉬고 살려면 먼저 사람을 피해 어디론가 가는 것이 우선적이게 되었습니다.
저 역시 사람을 피해 이곳 섬으로 왔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도피가 아니라, 랍비 모세 라이브가 말했듯이 "하루에 단 한 시간만이라도 사람들로부터 멀어져서 자기 자신의 존재를 위해서 쓰지 않는 사람은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는 말의 의미를 실천하기 위함입니다. 무엇보다도 아직 사람의 손길에 파괴되지 않은 이곳의 자연이 저를 숨쉬게 해줍니다. 사람들은 많은 것을 가졌지만, 이 작은 순수, 이 작은 자연성을 갖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 작은 것을 가지려면 많은 것을 버려야 합니다. 스님께서 '무소유(無所有)'의 진리를 일깨우셨지만 이제 사람들은 모든 것을 가진 나머지 무소유마저 가지려고 하고 있지 않습니까?
스님,
다시 여름이 왔습니다. 뿔 달린 노루와 반딧불을 적시던 초여름의 장대비도 이젠 멎고, 이른 아침 산길에 서면 아침별 하나가 허공에 흔들립니다. 그 부서지는 빛을 바라봅니다. 이 생에서 붙잡을 것은 아무것도 없고, 우리는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 채 행렬을 계속하지만, 그 부서지는 빛 하나가 저의 가슴에 와 닿습니다. 산다는 것은 떠난다는 것이고, 그 떠남은 끝이 없는 것임을 스님께선 저에게 일깨워 주셨습니다.
또다른 여름이 와서 스님이 머무시는 작고 고요한 암자를 불현듯 방문하게 될 날을 기다리겠습니다. 여름의 태양과 간간이 뿌려대는 빗줄기에 실어 이 글을 띄웁니다.
[7] 날으는 새는 곧 앉는다 (192~197쪽)
※ 운영자 주(註) : “날다”에 “-는”이 연결되면 “ㄹ”이 탈락되어 “나는”이 됩니다. 따라서 위 제목 “날으는”은 잘못된 것입니다만, 이 곳에서는 원문 그대로 인용합니다.
이곳에 움직이는 건 새뿐이다. 저쪽 나무숲에서 날아올라 오솔길을 가로질러서는 건너편 나무 뒤로 사라진다. 그리고는 또 한참동안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 주위에 나무가 많은 까닭에, 이 움막에 앉아 있으면 바람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내가 나를 잊을 수 있는 시간이다. 아니, 이곳에 시간마저 없다.
하루는 산중턱에 차를 세워 놓고, 옆의 숲으로 난 오솔길로 무심코 걸어들어갔다가 이 작은 집을 발견했다. 움막이란 말이 딱 어울릴 정도로 다 쓰러져가는 빈 집이었다. 마당에는 풀들이 무성하고, 문지방으로 들어서는 뜨락은 무너져 있었다. 누가 살다가 떠나는 것인지, 주변에 마을이라곤 하나 없는 산 높은 위치에 그런 집이 있었다. 낡긴 했지만 볕이 잘 드는, 첫 발길에 편안함과 그윽함이 느껴지는 그런 움막이었다.
그날부터 이곳은 나의 아쉬람이 되었다. 아쉬람이란 인도말로 명상처, 즉 쉬는 곳이란 뜻이다. 인도에 가면 산이나 숲속에 아쉬람이 있어서 찾아오는 이에게 명상을 가르친다. 내가 발견한 이 움막은 달리 이름붙일 필요도 없이 움악 그 자체로 나에게는 더없이 좋은 아쉬람이었다. 잠은 산 아래의 집에서 자고, 낮이면 이곳에서 와서 앉아 있는 것이 일과가 되었다. "뱀과 현자는 자기의 집을 짓지 않는다. 남의 집을 대신 사용할 뿐이다."라는 인도 속담대로 내가 잠시 앉아 있다 떠나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다. 이곳에 와서 '쉴' 수만 있다면 누군들 현자가 되지 않으랴.
움막 위의 공간은 툭 트인 하늘이다. 마당의 풀밭에 누워 있으면 구름이 흘러 산을 넘어가는 것이 보인다. 사방이 어찌나 고요한지 작은 풀벌레가 잉잉거리는 소리, 나뭇잎을 갉아먹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다. 움막 뒤의 더 높은 지대로 올라가서 내려다보면 멀리 햇빛 가득한 바다 위에 가물거리는 배들이 떠간다. 어떤 배는 빨리 지나가고, 또 어떤 것은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 떠 있다. 그것을 바라보고 있으면 눈이 부셔온다.
한번은 비가 내리는 날에 움막 뜨락의 돌 위에 앉아 대나무숲으로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었다. 비의 무게에 대나무잎이 흔들릴 때마다 비의 향기가 실려왔다. 그때 누군가 방목한 흰 말이 안개비속을 뚫고 움막으로 걸어들어왔다. 말의 속눈썹으로 빗물이 방울방울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말은 한동안 뜰의 풀을 뜯다가 다시 오솔길로 걸어 사라졌다.
그래선지 비가 내리면 이 움막은 더욱 운치가 있게 느껴진다. 초록으로 뒤덮인 작은 공간을 빗줄기가 감싸고, 침묵이 더욱 깊다. 새들이 비를 피해 소나무 가지 사이로 깊숙이 들어갔기 때문에, 솔방울인가 하고 자세히 바라보면 웅크리고 앉은 새다. 굳이 비가 내리는 날이 아니더라도 이곳은 하루종일 앉아 있어도 사람의 모습이 어른거리지 않는다. 세상을 잊고 고요해지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다. 햇빛이 나는 대로,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대로, 모든 소리와 작은 움직임들이 고요를 더해 준다. 어느 것 하나 '침묵과 홀로 있음에 보탬이 되는 소리'들만 있는 것이다.
선(禪)의 전통에는 이러한 것이 있었다고 전한다. 마음이 병든자가 선원으로 찾아오면 그에게 외따로 떨어진 움막을 주었다. 그가 그곳에서 무엇을 하든지 그것은 그의 자유였다. 움막 안에 하루 종일 누워 있거나, 움막 주위를 산책하거나, 비를 맞고 서 있거나 아무도 간섭하지 않았다. 먹을 것을 갖다 주는 사람도 그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그가 원한다면 채소밭을 일굴 수도 있었고, 밤이면 별을 보며 누워 있을 수도 있었다. 그러면 그의 병은 치료되었다. 그것이 선에서의 독특한 마음 치료법이었다. 마음의 병은 고요해지지 못하는 데서 오는 것임을 꿰뚫어본 것이다.
어느 곳을 가도 고요해지기 어려운 속세에서 이 움막은, 이곳 제주도에 이사온 지 석달만에 나에게 다가온 편안한 휴식처다. 나는 승려가 아니라서 암자를 갖지도 못했으며, 계율에 메이지 못하기 때문에 공동체 생활과도 거리가 멀다. 우리를 끌고 가는 저 생과 사의 수레바퀴를 보기 때문에, 내가 산 아래 도시에서 집을 이루고 사는 것도 가짜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성(聖)과 속(俗)의 어중간한 위치에 서 있는 내게 이곳은 암자도 아니고 집도 아니면서 내가 나에게로 깊어지는 장소를 제공한다.
그동안 도(道)의 길을 걷는다는 수많은 사람을 나는 만났다. 물론 누군들 생을 살면서 도의 길을 걷지 않겠는가마는, 이 시대의 가장 탁월한 영적 스승으로 일컬어지는 오쇼 라즈니쉬를 비롯하여 40년 가까이 모우니 사드후(침묵 생활)을 하고 있는 바바 하리 다스, 이름있는 명상센터에서 명상을 가르치는 구루들과 외국인 교사들, 이 땅의 승려와 성직자와 구도자를 두루 만날 수 있었다. 속세를 떠난 자도 있었고, 세상에 몸 담고서 초월의 세계를 기웃거리는 자도 있었으며, 스승에게서 새로운 이름을 받은 자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 돌이켜 보건대, 그들 중에서 도를 닦는 사람은커녕 도라는 말을 들어 보지도 못한 눈을 한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의 마음은 늘 시끄러웠으며, 고요함과도 거리가 멀었다.
둔눈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중세시대 회교 신비주의의 역사에서 그 깨달음이 가장 깊었던 사람으로 손꼽힌다. 그의 문하에서 배출된 뛰어난 제자는 수를 헤아릴 수 없다. 그러한 둔눈이 아직 도를 추구하던 무렵, 사막으로부터 머나먼 길을 여행해서 어느 작은 마을에 이르렀을 때다. 마을의 한 지붕 위에서 비가 새는 지붕을 손질하고 있던 여인 하나가 둔눈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는 웃음을 터뜨리는 것이었다. 당황한 둔눈이 그 까닭을 묻자 여인은 말했다.
"당신을 마을의 입구로 들어서는 모습을 보았을 때 내 눈에는 옷만 보이고 당신은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도(道)를 깨친 신비가라고 생각했소. 그러다가 더 가까이 왔을 때 나는 당신이 도인도 아니고 스승도 아니며 아직도 수행자라는 걸 알았는데, 그것은 당신 얼굴을 조금 볼 수가 있었기 때문이오. 하지만 아직도 먼 거리였기 때문에 난 당신 눈을 볼 수가 없었소. 그러자 당신이 더욱 가까이 왔고, 난 당신 눈을 보고는 수행자는커녕 도를 닦는 사람도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소. 이렇게 눈앞에까지 와서 자세히 보니까 당신은 도를 닦는 사람은커녕 '도'라는 단어를 들어 보지도 못한 사람 같소. 그래서 나는 웃은 것이오. 겉으로 보면 당신은 신비가 같지만 당신이 입고 있는 승복과 얼굴이 서로 어울리지 않소."
전해 오는 얘기에 따르면 그 길로 둔눈은 옷을 벗어 버리고 사막으로 들어갔다. 오랫동안 그가 어떻게 되었는지 통 소식이 없었다. 그가 사막의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 20년 동안 아무도 알 길이 없었는데, 그 20년이라는 세월 후에 둔눈은 눈부신 깨달음으로 보석 중의 보석이 되었다.
소유와 집착의 허망함을 경전에서 읽고, 무상한 현상 뒤에 내재한 영원한 도와 이치를 경전에서 외우고 있으나, 우리는 그 경전의 언어들로 자신을 화려하게 장식한 채 우리가 진정으로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삶을 살고 있다. 그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마음의 시끄러움 때문이고, 시끄러움을 감추기 위해 '고요함'이란 소리를 하나 더 덧보태고 다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둔눈처럼 승복과 얼굴이 서로 어울리지 않는 얼굴을 하고 있다.
자연이 마련해 준 이 움막은 나에게 진정한 고요하을 일깨워 준다. 그동안 내 머리가 수집한 진리의 말들을 남김없이 잊어야 함을 배우게 한다. 움막 입구에는 벌써 수국이 만발하고, 마당 둘레엔 망초꽃이 하얗다. 대나무숲 옆에는 붉은 유도화가 앞다퉈 피어 있다. 그리고 이름없는 풀들.
'이곳에 사람은 없으니 때가 되니 풀들은 저절로 푸르다(無人水流花開).'
그렇다. 이 움막에 사람은 없다. 내가 있어도, 그곳에 나는 없다. 풀은 저절로 푸르러져, 그것을 거울처럼 비추는 두 눈은 있어도 사람은 없다. 고요하면 맑아지고, 맑아지면 밝아지고, 밝아지면 보인다.
여러 해만에 평온함이 찾아와 풀 한 포기에 눈이 열리게 되기까지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에 눈이 멀어 있어야 하는 것인가? 열린 눈은 세상 경전의 무가치함을 연역한 풀줄기에서 깨닫는다. 세상의 경전을 모두 땅에 파묻어 썩게 하고, 그 썩은 흙에서 풀 한 포기, 망초꽃 하나가 피어나게 한다.
자연으로서의 생, 이 평온함, 이 침묵에 이르기 이해 우리는 얼마나 먼 길을 헤매 다니는 것인가? 그러나 그 길은 언젠가는 끝이난다. 오라, 이 움막으로. 이곳에서 잔가지를 주워모아 봄감자를 구워먹으면서 밤하늘의 별무리를 바라보아도 좋고, 가끔은 비 속에서 불쑥 얼굴을 내미는, 누군가 방목한 말에게 어린애처럼 놀라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