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소개] 『삶이 나에게 가르쳐 준 것들』
서문(序文)
집이 없는 자는 집을 그리워 하고
집이 있는 자는 빈 들녘의 바람을 그리워 한다.
나 집을 떠나 길 위에 서서 생각하니
삶에서 잃은 것도 없고 얻은 것도 없다.
모든 것들이 빈 들녘의 바람처럼
세월을 몰고 다만 멀어져 갔다.
어떤 자는 울면서 웃을 날을 그리워하고
웃는 자는 또 웃음 끝에 다가올 울음을 두려워한다.
나 길가에 피어난 꽃에게 묻는다.
나는 무엇을 위해서 살지 않았는가를.
살아 있는 자는 죽을 것을 염려하고
죽어가는 자는 더 살지 못했음을 아쉬워한다.
자유가 없는 자는 자유를 그리워하고
어떤 나그네는 자유에 지쳐 길에서 쓰러진다.
- 서문을 대신하여,
류시화 1994년 봄
▣ 『삶이 나에게 가르쳐 준 것들』 / 류시화 지음 / 푸른숲 / 1991년 첫판 1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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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귀 속의 바람 (18~20쪽)
한때 인도의 음악이 나를 사로잡은 적이 있었다. 그 대나무 피리와 현악기 시타르의 울림이 바람처럼 온통 내 귀를 채웠었다. 다른 아무것도 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 '귀 속의 바람' 때문에 나는 늘 머리가 뜨거웠다.
인도, 까닭없이 내 머리를 뜨겁게 하던 나라...... 인도 여행 중에 나는 운 좋게도 인도 대피리 연주의 일인자 하리 프라사드와 시타르 연주의 세계적 거장 라비 샹카의 연주회를 이틀에 걸쳐 들을 수 있었다. 어느 허름한 학교 운동장에서 밤 열시에 시작해서 다음날 아침 열시에 끝난 그 가슴벅찬 '귀 속의 바람'을 내 어찌 잊을 수 있단 말인가? 악기의 줄을 고르는 데만 두어 시간이 걸렸었다.
내가 나를 잊게 하던 피리의 가락과 현의 울림, 살아온 날들이 쉽지 않았음을 위로하고 내 안의 바람을 잠재우던 그 음들, 눈부신 손가락이 만들어 내는 저 회한과 떨림, 나를 괴롭혔던 만남과 헤어짐들 사이로 파고드는 피리의 현란한 곡조, 아아, 살아오면서 때로 우리는 서로 가까이 있음을 견디지 못했고, 때로는 서러 멀어져 감을 두려워하지 않았던가?
아침이 되어서 나는 연주회장을 떠나 갈 곳 없이 인도의 들판을 헤매었다. 뜨거운 태양, 가끔씩 서 있는 키 큰 보리수 나무말고는 풀포기조차 없는 들판, 먼지 묻은 맨발의 나를 그 음악이 계속 따라왔었다. 아니, 아직도 그 음악은 내 귀 속에서 바람을 불게 하고 있다.
밤 깊은 시각, 그 '귀 속의 바람'처럼 지금 이 벌레들이 고요함 속에서 나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있다. 중세의 철학자 스피노자가 말했다는 '만물 속에 편재해 있는 그것'의 소리를 지금 나는 듣고 있는 것일까?
'만물 속에 편재해 있는 그것'은 자연의 소리말고 우리와 대화할 다른 언어를 갖고 있지 않다. 눈 내리는 소리로, 빗소리로, 지금도 창밖에 스펴 지나가는 저 바람소리로, 그리고 개구리 울음소리로 그것은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다. 때로는 이 책장 위에 떨어져 죽으면서 내는 날벌레들의 소리로. 그리고 때로는 소리 없는 소리로. 침묵으로.
그것을 불교의 어떤 경전에서는 "무정물(無情物)의 설법을 들으러"고 했다. 무정물이란 돌, 모래, 별 같은 것들이다.
지금은 깊은 밤. 어느새 두시가 지났다. 어디선가 다시 바람에 물이 비껴서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낮 동안에 내가 스펴 지나간 사람들은 지금 무슨 꿈을 꾸고 있을까? 삶이란, 흔히들 말하는 대로 지금 전등불에 와서 부딪치는 이 벌레들처럼 덧없는 것일까? 아니, 그러한 덧없음을 느낄 겨를도 없이 우리는 그저 삶의 물결에 휩쓸려만 가는 것일까?
그리하여 우리가 진정으로 얻는 것과 잃어 버리는 것은 무엇인가?
동양의 한 선사가 임종을 맞이했다. 제자들과 신도들이 그의 마직막 말을 기다리며 조용히 주위에 앉아 있었다. 그러나 선사는 시간이 지나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의 죽음을 지켜보기 위해 방문한 다른 선사가 그에게 말했다.
"여보게, 죽기 전에 제자들에게 무언가 말을 남겨야 할 것이 아닌가? 왜 침묵을 지키고 있는가?"
그러자 죽어가던 선사는 손가락으로 집의 지붕을 손짓해 보였다. 지붕 위에서는 다람쥐 두 마리가 장난을 치면서 뛰어다니고 있었다. 사람들은 문득 고요한 가운데 그 다람쥐들이 찍찍거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고 한다.
죽으면서 우리는 과연 무엇을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저 바람소리를, 저 벌레들 소리를 들으라고 손짓해 보이는 것말고는 무슨 소음을 낼 수 있겠는가?
[2] 달과 손가락 (171~173쪽)
동양에는 선불교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아름다운 비유가 하나 있다. 그것은 곧 달을 보아야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언어나 문자에 집착해 그것이 가리키는 진리는 정녕 보지 못함을 비유한 말이다.
시인이었던 케르만의 아와디가 밤중에 집 앞에 구부리고 앉아 있을 때 루미의 스승이었던 타브리즈의 샴스가 지나가다가 물었다.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시인이 대답했다.
“물동이에 비친 달을 바라보며 명상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샴스가 말했다.
“당신의 목이 부러지지 않았다면 왜 하늘에 걸린 달을 직접 바라보지 않습니까?”
하지만 우리들은 기존관념이나 선입견으로 모든 사실을 해석해 버린다. 잘못된 교육을 통해서 그것들은 우리의 뇌리 속에 이미 박혀 버린 것이다. 야외에 나가서 풍경화를 그리는 국민학생들을 보면 하늘에 구름이 끼었든지 말았든지 무조건 하늘은 하늘색으로 칠한다. 땅의 색깔이 어떠했는지 무조건 황토색으로 땅을 그리는 것이다.
우리는 어릴 적부터 이미 융통성 없는 지식에 매여 있다. 사실 그러한 지식을 깨뜨리고 진리를 바로 볼 수 있도록 한 사람들이 바로 예수, 부처, 노자 같은 사람들인 것이다. 그들이 가는 곳에는 항상 정신의 혁명이 일어났다.
진리란 진리에 대한 지식과는 다른 것이다. 선입견은 죽은 것이다. 거기에는 더 이상 생명력이 없다. 우리를 감동시키고 우리 존재를 변화시키는 힘이 없는 것이다. 오직 거기에는 죽은 안정만이 남아 있다.
한 가톨릭 신부가 이렇게 한탄했다고 하지 않은가?
“예수가 가는 곳마다 혁명이 일어났으나, 내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은 차를 대접할 뿐이다.”
처음 탄생된 종교는 신선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거기에 인간의 욕망들이 덧붙여져서는 점점 추한 것으로 변해간다. 모든 것이 손에 닿기만 하면 황금으로 변해 버리는 그리스 신화의 어느 왕처럼 인간의 욕망은 모든 것을 추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는 그 욕망을 베일에 감추기 위해서 교리와 도덕으로 덧칠을 해놓지만 거기에는 이미 아무런 생명력도 남아 있지 않다. 한번 욕망의 굴레에 떨어져 버린 이상 진리에 대한 관심은 꺽여진 꽃처럼 시들어 버린다.
여러 세기 전에 죽은, 한 고대 철학자가 하늘에서 내려다보니 후계자들이 그의 사상을 잘못 해석하고 있었다. 자비심과 진리에 대한 사랑에 넘친 그 철학자는 많은 노력 끝에 겨우 신의 허락을 얻어 며칠 동안만 지상에 다시 내려올 수 있었다.
후계자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확인시키는 데만 여러 날이 걸렸다.
일단 그의 존재를 알자 후계자들은 그가 설명해 주는 사상의 본질에 대해선 관심이 없고 오로지 그가 어떻게 다시 지상으로 내려올 수 있었는가에만 관심을 쏟았다.
우리가 갖고 있는 선입견은 항상 성스러움과 속됨을, 아름다움과 추함을 나눈다. 사실 그것은 인간의 머리 속에서 나온 생각일뿐 삼라만상 그 어느 것도 그런 식으로 나눌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스스로 나누어 놓고서는 그 분별심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단죄한다. 스스로 괴로워하고 스스로 용서를 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식의 완전함에 이르러 스스로의 생각에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있었다. 자신의 사념에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 사람, 내면의 본성을 따라 자유롭게 사는 사람이 있었다. 나에게 있어서 종교는 그러한 사람으로 가까이 가는 길이었다.
동양에서는 그런 사람을 도인이라고 불렀고 서양에서는 성자라고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