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소개] 『나의 상처는 돌 너의 상처는 꽃』
류시화 시인의 세 번째 시집 『나의 상처는 돌 너의 상처는 꽃』은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외눈박이 물고의 사랑』 이후 15년 만에 펴낸 것입니다(2012년). 그동안 써 두었던 다수의 시 가운데 엄선하여 수록하였습니다.
두 번째 시집 이후 15년 만에 시집을 낸다.
350여 편의 시에서 56편을 모았다.
<옹이> 외에는 모두 미발표작이다.
시집을 묶는 것이 늦은 것도 같지만
주로 길 위에서 시를 썼기 때문에
완성되지 못한 채 마음의 갈피에서
유실된 시들이 많았다.
삶에는 시로써만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
류시화
▣ 『나의 상처는 돌 너의 상처는 꽃』 / 류시화 / 문학의 숲 / 2012년 4월 23일 1판 1쇄 발행.
◉ 내용 보기
[1] 옹이 (본문 12쪽)
흉터라고 부르지 말라
한때는 이것도 꽃이었으니
비록 빨리 피었다 졌을지라도
상처라고 부르지 말라
한때는 눈부시게 꽃물을 밀어 올렸으니
비록 눈물로 졌을지라도
죽지 않을 것이면 살지도 않았다
떠나지 않을 것이면 붙잡지도 않았다
침묵할 것이 아니면 말하지도 않았다
부서지지 않을 것이면, 미워하지 않을 것이면
사랑하지도 않았다
옹이라고 부르지 말라
가장 단단한 부분이라고
한때는 이것도 여리디여렸으니
다만 열정이 지나쳐 단 한 번 상처로
다시는 피어나지 못했으니
※ 안내 : “옹이”는 엮음 시집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2005년)에 수록된 바 있습니다. 그리고 2008년 5월 7일 [낭독의 발견]이라는 방송 프로그램에서 배우 추상미씨가 류시화 시인의 [옹이]를 낭녹한 바 있습니다.
[2] 직박구리의 죽음 (본문 44~46쪽)
오늘 나는 인간에 대해 생각한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가령 옆집에 사는 다운증후군 아이는 인간으로서
어떤 결격사유가 있는가
그날은 그해의 가장 추운 날이었다
겨울이었고
대문 두드리는 소리에 밖으로 나가 보니
그 아이가 서 있었다
죽은 새 한 마리를 손에 들고
늘 집에 갇혀 지내는 아이가 어디서
직박구리를 발견했는지는 모른다
새는 이미 굳어 있었고 얼어 있었다
아이는 어눌한 목소리로 부탁했다
뜰에다 새를 묻어 달라고
자기 집에는 그럴 만한 장소가 없다고
그리고 아이는 떠났다 경직된
새와 나를 남겨 두고 독백처럼
눈발이 날리고
아무리 작은 새라도 언 땅을
파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흰 서리가
땅속까지 파고들어 가 있었다
호미가 돌을 쳐도 불꽃이 일지 않았다
아이가 돌아온 것은 그때였다
다시 대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고
아이는 신발 한 짝을 내밀며 말했다
새가 춥지 않도록 그 안에 넣어서 묻어 달라고
한쪽 신발만 신은 채로
양말도 신지 않은 맨발을 하고서
새를 묻기도 전에 눈이 쌓였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이해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인가
사랑하기 때문에 이해하는 것인가
무표정에 갇힌 격렬함
불완전함 속의 완전함
너무 오래 쓰고 있어서 진짜 얼굴이 되어 버린
가면
혹은, 날개가 아닌 팔이라서 날 수 없으나
껴안을 수 있음
[3] 이런 시를 쓴 걸 보니 누구를 그 무렵 사랑했었나 보다 (110~111쪽)
꽃눈 틔워 겨울의 종지부를 찍는
산수유 아래서
애인아, 슬픔을 겨우 끝맺자
비탈밭 이랑마다 새겨진 우리 부주의한 발자국을 덮자
아이 낳을 수 없어 모란을 낳던
고독한 사랑 마침표를 찍자
잠깐 봄을 폐쇄시키자
이 생에 있으면서도 전생에 있는 것 같았던
지난겨울에 대해 나는 아무 할 말이 없다
가끔 눈 녹아 길이 질었다는 것 외에는
젖은 흙에 거듭 발이 미끄러졌다는 것 외에는
너는 나에게 상처를 주지만 나는 너에게 꽃을 준다, 삶이여
나의 상처는 돌이지만 너의 상처는 꽃이기를, 사랑이여
삶이라는 것이 언제 정말 우리의 것이었던 적이 있는가
우리에게 얼굴을 만들어 주고
그 얼굴을 마모시키는 삶
잘 가라, 곁방살이하던 애인아
종이 가면을 쓰고 울던 사랑아
그리움이 다할 때까지 살지는 말자
그리움이 끝날 때까지 만나지는 말자
사람은 살아서 작별해야 한다
우리 나머지 생을 일단 접자
나중에 다시 펴는 한이 있더라도
이제는 벼랑에서 혼자 피었다
혼자 지는 꽃이다
※ ‘삶이라는 것이 언제 ~ 마모시키는 삶’ - 옥타비오 빠스 <태양의 돌>에서
[4] 달개비가 별의 귀에 대고 한 말 (116~117쪽)
오늘 나는 죽음에 대해 회의를 갖는다
이 달개비, 허락 없이 생각의 경계를 넘어와 지난해
두세 포기였는데 올해
마당 한 귀퉁이를 다 차지했다
뽑아서 아무 데나 던져도 흙 근처
마디에서 뿌리를 내리는 이
한해살이풀의 복원력
단순히 죽음과 소멸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연약한 풀이 가진
세상에 대한 변함없는 애정
그것이 나를 긍정론자이게 만든다
물결 모양으로 퍼져 가는 유연함
한쪽이 막히면 다른 쪽 빛을 찾아 나가는 본능적 지성
다른 꽃들에 변두리로 밀리면서도 그 자신은
중심에 서 있는 존재감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불에 덴 것처럼 놀라는 인간들과는 사뭇 다르다
나는 장미가 이 닭의장풀보다 귀하다는 것을 안다
신의 눈에는 그 반대일 수 있다는 것도
달개비의 여윈 손목을 잡고 해마다
두꺼비와 가시 연꽃과 붉은가슴도요새가 나온다
무당벌레와 흰올빼미도 나온다
오늘 나는 달개비에 대해 쓴다
묶인 곳 없는 영혼에 대해
사물들은 저마다 시인을 통해 말하고 싶어 한다
나비가 태어나는 곳이나 생각의 틈새에서 자라는
이 마디풀에게서 배울 점은 다름 아닌
신비에 무플 꿇을 필요
신비에 고개 숙일 필요
[5] 순록으로 기억하다 (123쪽)
내가 시인이라는 걸 알고 어떤 이가
툰드라의 순록에 관한 시를 써 보라고 했다
가축화되기 전에 순록은 야생으로 무리 지어 먼 거리를 이동했는데
소금이 필요할 때면 어쩔 수 없이
인간의 천막으로 다가왔다
이때 다른 무리들은 모두 소금을 받아먹어도
한 마리 순록만은 먹기를 거부하며 서 있었다고 한다
인간들에게 소금을 제공받는 대신
그 순록은 나머지 족속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기로 결정하고
그 자리에 나와
의연하게 서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인간과 순록들 사이 무언의 약속이었다
순록의 무리는 그럼으로써 인간에게 종속되지 않을 수 있었다
소금 바람 속에 서 있어 본다
그 순록으로 기억하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