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소개]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
류시화 시인의 두번째 시집(1996년)입니다. 총 61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법정스님과 이해인 수녀님의 글로 소개를 대신합니다.
[법정 스님] 나는 류시화 시인이 옮겨 펴내는 명상서적의 독자이며 또한 그의 시의 애독자이기도 하다. 첫번째 시집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이후 한층 깊어진 그의 시세계를 접하는 독자들은 이 가을에 더욱 맑은 눈과 따뜻한 가슴을 지니게 될 것이다. 좋은 시를 자신의 목소리로 두런두런 읽고 있으면 피가 맑아지고 사람에 향기가 돈다.
[이해인 수녀]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을 읽는 동안 마음이 맑고 따뜻하고 고요해졌습니다. 조금은 쓸쓸한 냄새가 나는 것 같지만 허무하지 않은, 막힘없이 쉽게 읽히면서도 결코 가볍지 않은 깊이로 읽는 이의 마음과 영혼을 끌어당기는 사랑과 자연의 노래들. 우리를 명상의 숲으로 초대하는 아름다운 노래들.
▣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 / 류시화 / 도서출판 열림원 / 1996년 10월 20일 1판 1쇄 발행.
◉ 내용 보기
[1]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
외눈박이 물고기처럼 살고 싶다
외눈박이 물고기처럼
사랑하고 싶다
두눈박이 물고기처럼 세상을 살기 위해
평생을 두 마리가 함께 붙어 다녔다는
외눈박이 물고기 비목*처럼
사랑하고 싶다
우리에게 시간은 충분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만큼 사랑하지 않았을 뿐
외눈박이 물고기처럼
그렇게 살고 싶다
혼자 있으면
그 혼자 있음이 금방 들켜 버리는
외눈박이 물고기 비목처럼
목숨을 다해 사랑하고 싶다
※ 비목(比目) - 당나라 시인 노조린의 시에 나오는 물고기.
※ 운영자 주(註) : 참고적으로 “비목(比目)”이라는 단어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비목어(比目魚) → 넙치”라고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넙치는 가자미과의 바닷물고기로서 눈은 두개가 모두 왼쪽 머리에 쏠려 있습니다. 그런데 류시화 시인이 “한쪽으로 치우친 눈”이 아닌 “외눈박이”에 중점을 둔 것은 시적인 감흥을 위해서인 것 같습니다. 반면 혹자(wellup)는 시적감흥을 반감시키더라도 넙치를 이 시의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잘못된 인용을 바로 잡으라고 하기도 합니다. 이 점, 위 시를 읽는데 착오없으시길 바랍니다. (2000.06.10.)
[2] 지금은 그리움의 덧문을 닫을 시간
세상을 잊기 위해 나는
산으로 가는데
물은 산 아래
세상으로 내려간다
버릴 것이 있다는 듯
버리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 있다는 듯
나만 홀로 산으로 가는데
채울 것이 있다는 듯
채워야 할 빈 자리가 있다는 듯
물은 자꾸만
산 아래 세상으로 흘러간다
지금은 그리움의 덧문을 닫을 시간
눈을 감고
내 안에 앉아
빈 자리에 그 반짝이는 물 출렁이는 걸
바라봐야 할 시간
[3] 여우사이
나무와 나무 사이
섬과 섬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
어디에나 사이가 있다
여우와 여우 사이
별과 별 사이
마음과 마음 사이
그 사이가 없는 곳으로 나는 가고 싶다
물과 물고기에는 사이가 없다
파도와 파도에는 사이가 없다
새와 날개에는 사이가 없다
나는 너에게로 가고 싶다
사이가 없는 그곳으로
[4] 속눈썹
너의 긴 속눈썹이 되고 싶어
그 눈으로 너와 함께
세상을 바라보고 싶어
네가 눈물 흘릴 때
가장 먼저 젖고
그리움으로 한숨지을 때
그 그리움으로 떨고 싶어
언제나 너와 함께
아침을 열고 밤을 닫고 싶어
삶에 지쳤을 때는
너의 눈을 버리고 싶어
그리고 너와 함께
흙으로 돌아가고 싶어
※ 참고 : 민중가요 노래패(포크 그룹) 노래마을 출신 손병휘씨가 솔로 독립 이후 첫 음반 [속눈썹]을 냈는데, 거기에는 여러 시인의 시(詩)에 곡을 붙인 11곡이 실려 있습니다. 그 중 두번째 트랙이 바로 류시화의 시 [속눈썹]에 곡을 붙인 것입니다.
[5] 입술 속의 새
내 입술 속의 새는 너의 입맞춤으로
숨막혀 죽기를 원한다
내가 찾는 것은
너의 입술
그 입술 속의 새
길고 긴 입맞춤으로 숨 막혀 죽는 새
나는 슬픔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너를 껴안는다
내 모든 것을 잊기 위해
삶은 다만 그림자
실낱 같은 여름 태양 아래 어른거리는
하나의 환영
그리고 얼마큼의 몸짓
그것이 전부
나는 고통 없는 세계를 꿈꾸진 않았다
다만 더 이상 상처받는 일이 없기를
내가 찾는 것은 너의 입술
단 한 번의 입맞춤으로
입술 속에서
날개를 파닥이며 숨 막혀 죽는 새
밤이면 나는 너를 껴안고
잠이 든다 나 자신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온 몸으로 너를 껴안고
내 모든 걸 잊기 위해
[6] 소금별
소금별에 사는 사람들은
눈물을 흘릴 수 없네
눈물을 흘리면
소금별이 녹아 버리기 때문
소금별 사람들은
눈물을 감추려고 자꾸만
눈을 깜박이네
소금별이 더 많이 반짝이는 건
그 때문이지
[7] 그건 바람이 아니야
내가 널 사랑하는 건
그건 바람이 아니야
불 붙은 옥수수처럼
내 마음을 흔들며 지나가는 것
그건 바람이 아니야
내가 입 속에 혀처럼 가두고
끝내 하지 않는 말
그건 바람이 아니야
내 몸 속에 들어 있는 혼
가볍긴 해도 그건 바람이 아니야
[8] 거리에서
거리에서
한 남자가 울고 있다
사람들이 오가는 도시 한복판에서
모두가 타인인 곳에서
지하도 난간 옆에 새처럼 쭈그리고 앉아
한 남자가 울고 있다
아무도 그 남자가 우는 이유를 알지 못한다
그리고 아무도 그 눈물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
거리에서 한 남자가 울고 있다
한 세기가 저물고
한 세기가 시작되는 곳에서
모두가 타인일 수밖에 없는 곳에서
한 남자가 울고 있다
신이 눈을 만들고 인간이 눈물을 만들었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 역시 그가 우는 이유를 알지 못한다
나는 다만 그에게
무언의 말을 전할 수밖에 없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은
눈물이라고
[9] 눈물
슬픔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안이 환하다
누가 등불 한 점을 켜놓은 듯
노오란 민들레 몇 점 피어 있는 듯
슬픔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민들레밭에
내가 두 팔 벌리고
누워 있다
눈썹 끝에
민들레 풀씨 같은
눈물을 매달고서
눈을 깜박이면 그냥
날아갈 것만 같은
[10] 사과나무
아주 가끔은
사과나무 아래 서 있고 싶다
살아온 날과 살아갈 날들이
두 팔 벌리고 서 있는
사과나무밭
태양이 눈부신 날이어도 좋고
눈 내리는 그 저녁이어도 좋으리
아주 가끔은 그렇게
사과나무 아래 서 있고 싶다
내가 아직 어린 소년이어도 좋고
사과나무처럼 늙은 뒤라도 좋으리
가끔은 그렇게
사과나무 아래 서 있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