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소개]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류시화 시인의 첫번째(1991년) 시집입니다. 한국전자출판연구회가 2000년 발간한 “출판논총” 제2집의 수록 논문 “베스트셀러 변화의 추이와 그 맥락에 관한 연구(조도현)”에 따르면, 지난 10년간(1989~1998) 베스트셀러 순위에 가장 많이 올랐던 책은 류시화의 시집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인 것으로 나타났다고 합니다(국민일보 2000.6.26). 물론 이 이후 현재까지도 여전히 베스트셀러 혹은 스테디셀러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 류시화 / 푸른숲 / 1991.9.12. 첫판 1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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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물 속에는
물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는
그 하늘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내 안에는
나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있는 이여
내 안에서 나를 흔드는 이여
물처럼 하늘처럼 내 깊은 곳 흘러서
은밀한 내 꿈과 만나는 이여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2] 목련
목련을 습관적으로 좋아한 적이 있었다
잎을 피우기도 전에 꽃을 먼저 피우는 목련처럼
삶을 채 살아 보기도 전에 나는
삶의 허무를 키웠다
목련나무 줄기는 뿌리로부터 꽃물을 밀어올리고
나는 또 서러운 눈물을 땅에 심었다
그래서 내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모든 것을 나는 버릴 수 있었지만
차마 나를 버리진 못했다
목련이 필 때쯤이면
내 병은 습관적으로 깊어지고
꿈에서마저 나는 갈 곳이 없었다
흰 새의 날개들이 나무를 떠나듯
그렇게 목련의 흰 꽃잎들이
내 마음을 지나 땅에 묻힐 때
삶이 허무한 것을 진작에 알았지만
나는 등을 돌리고 서서
푸르른 하늘에 또 눈물을 심었다
[3] 안개 속에 숨다
나무 뒤에 숨는 것과 안개 속에 숨는 것은 다르다
나무 뒤에선
인기척과 함게 곧 들키고 말지만
안개 속에서는
가까이 있으나 그 가까움은 안개에 가려지고
멀리 있어도 그 거리는 안개에 채워진다
산다는 것은 그러한 것
때로 우리는 서로 가까이 있음을 견디지 못하고
때로는 멀어져감을 두려워한다
안개 속에 숨는 것은 다르다
나무 뒤에선 누구나 고독하고, 그 고독을 들킬까 굳이 염려하지만
안개 속에서는
삶에서 혼자인 것도 여럿인 것도 없다
그러나 안개는 언제까지나 우리 곁에 머무를 수 없는 것
시간이 가면
안개는 걷히고 우리는 나무들처럼
적당한 간격으로 서서
서로를 바라본다
산다는 것은 결국 그러한 것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게
시작도 끝도 알지 못하면서
안개 뒤에 나타났다가 다시 안개 속에 숨는 것
나무 뒤에 숨는 것과 안개 속에 숨는 것은 다르다
[4] 새와 나무
여기 바람 한 점 없는 산속에 서면
나무들은 움직임 없이 고요한데
어떤 나뭇가지 하나만 흔들린다
그것은 새가
그 위에 날아와 앉았기 때문이다
별일없이 살아가는 뭇사람들 속에서
오직 나만 홀로 흔들리는 것은
당신이
내 안에 날아와 앉았기 때문이다
새는 그 나뭇가지에 집을 짓고
나무는 더이상 흔들리지 않지만
나만 홀로 끝없이 흔들리는 것은
당신이 내 안에 집을 짓지 않은 까닭이다
[5] 소금인형
바다의 깊이를 재기 위해
바다로 내려간
소금인형처럼
당신의 깊이를 재기 위해
당신의 피 속으로
뛰어든
나는
소금인형처럼
흔적도 없이
녹아 버렸네
※ 참고 : 가수 안치환님이 류시화 시인의 이 시(詩)에 곡을 붙인 노래도 있습니다. 해당 노래는 안치환님의 음반 3집(1993년 10월) “Confession”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아래의 음반 표지는 발매 당시와 동일한지는 확인이 어렵습니다.
[6] 벌레의 별
사람들이 방안에 모여 별에 대한 토론을 하고 있을 때
나는 문 밖으로 나와서 풀줄기를 흔들며 지나가는
벌레 한 마리를 구경했다
까만 벌레의 눈에 별들이 비치고 있었다
그것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기 위해 나는
벌레를 방안으로 데리고 갔다
그러나 어느새 별들은 사라지고
벌레의 눈에 방안의 전등불만 비치고 있었다
나는 다시 벌레를 풀섶으로 데려다 주었다
별들이 일제히 벌레의 몸 안에서 반짝이기 시작했다
[7] 비 그치고
비 그치고
나는 당신 앞에 선 한 그루
나무이고 싶다
내 전생애를 푸르게, 푸르게
흔들고 싶다
푸르름이 아주 깊어졌을 때쯤이면
이 세상 모든 새들을 불러 함께
지는 저녁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8] 자작나무
아무도 내가 말하는 것을 알 수가 없고
아무도 내가 말하지 않는 것을 말할 수 없다
사랑은 침묵이다
자작나무를 바라보면
이미 내 어린시절은 끝나고 없다
이제 내 귀에 시의
마직막 연이 들린다 내 말은
나에게 되돌아 울려오지 않고
내 혀는 구제받지 못했다
[9] 슬픔에게 안부를 묻다
너였구나
나무뒤에 숨어 있던 것이
인기척에 부스럭거려서 여우처럼 나를 놀라게 하는 것이
슬픔, 너였구나
나는 이 길을 조용히 지나가려 했었다
날이 저물기 전에
서둘러 이 겨울숲을 떠나려고 했었다
그런데 그만 너를 깨우고 말았구나
내가 탄 말도 놀라서 사방을 두리번 거린다
숲 사이 작은 강물도 울음을 죽이고
잎들은 낮은 곳으로 모인다
여기 많은 것들이 변했지만 또
하나도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
한 때 이곳을 울려 퍼지던 메아리의 주인들은
지금 어디에 있느가
나무들 사이를 오가던 흰 새의 날개들같던
그 눈부심은
박수치며 날아오르던 그 세월들은
너였구나
이 길 처음부터 나를 따라오던 것이
서리 묻은 나뭇가지를 흔들어 까마귀처럼 놀라게 하는 것이
너였구나
나는 그냥 지나가려 했었다
서둘러 말을 타고 이 겨울숲과 작별하려 했었다
그런데 그만 너에게 들키고 말았구나
슬픔, 너였구나
[10] 눈 위에 쓴 시
누구는 종이 위에 시를 쓰고
누구는 사람 가슴에 시를 쓰고
누구는 자취없는 허공에 대고 시를 쓴다지만
나는 십이월의 눈 위에 시를 쓴다
눈이 녹아 버리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나의 시
[11] 누구든 떠나갈 때는
누구든 떠나갈 때는
날이 흐린 날을 피해서 가자
봄이 아니라도
저 빛 눈부셔 하며 가자
누구든 떠나갈 때는
우리 함께 부르던 노래
우리 나누었던 말
강에 버리고 가자
그 말과 노래 세상을 적시도록
때로 용서하지 못하고
작별의 말조차 잊은 채로
우리는 떠나왔네
한번 떠나온 길은
다시는 돌아갈 수 없었네
누구든 떠나갈 때는
나무들 사이로 지는 해를
바라보았다 가자
지는 해 노을 속에
잊을 수 없는 것들을 잊으며 가자
[12] 나무는 자살을 꿈꾸지 않는다
여기 죽은 나무가 있다
누군가 소리쳐서 뒤돌아보니
그곳에 내가 쓰러져 있었다
물을 주면 살아날지도 몰라
누군가 다가가서 흔들어 본다
죽은 나무는 기척이 없다
나무는 자살을 꿈꾸지 않는다
그냥 잎을 버리고
죽을 뿐이다
이책......한...20권은샀겠다............그시절에......나의아팠던 20대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