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칼릴 지브란의 사상과 철학
칼릴 지브란의 문학이 형태보다는 메시지 전달에 중점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작품을 통해 사상과 철학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칼릴 지브란 철학의 사상적 배경
첫 번째 요소는 종교입니다. 칼릴 지브란의 어머니 카밀레 라메는 이스티판 라메라는 마론파 성직자의 딸이었는데, 독실한 신자였습니다. 그래서 지브란도 어릴 때부터 엄격한 종교 교육을 받으면서 성장하였습니다. 지브란이 영향을 받았던 두 번째 요는 니체의 철학입니다. 메리 헤스켈은 그가 열 두 살 때부터 니체의 작품을 읽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지브란은 니체를 '19세기의 가장 외로운 사람이자 가장 위대한 사람'이라고 말하면서 그에게 존경심을 표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지브란의 철학이 니체의 철학과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세 번째 요소는 이븐 시나를 비롯한 아랍의 신비주의 철학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브란은 '이븐 시나의 시보다 나의 믿음과 나의 정신적인 성향에 가까운 시는 없다'라고 말할 만큼 이븐 시나에 심취되어 있었습니다. 지브란 사상의 네 번째 철학적 근거는 불교의 윤회 사상입니다. 그가 보스턴의 차이나타운에 가주하던 당시 그곳 사람들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그는 종교로서의 윤회설을 믿은 것이 아니라 완성과 불멸을 위해 정진하는 인간 본성에 바탕을 둔 정신적 윤회를 주장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지브란은 로댕이 언급한 바 있는 윌리럼 블레이크(William Blake, 1757-1827)의 영향도 받은 듯 합니다. '성경 시인'이라고 불리었던 William Blake는 모든 사물에 신성이 내재되어 있다고 보았으며, 시와 회화에서 동시에 재능을 발휘하였다는 점에서 지브란과 비슷했습니다.
2. 칼릴 지브란과 낭만주의
지브란은 작품 속에서 순수한 사랑, 고통, 슬픔, 고독, 침묵, 자유, 자연 등을 노래하는 낭만주의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낭만주의는 서구의 낭만주의와 더불어 동양의 수피즘이 혼합된 형태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지브란의 사랑에 대한 관념은 아랍의 순애시와 유사한 순수한 정신적 혹은 육체적 사랑을 담고 있습니다. 이러한 낭만적인 사랑은 『부러진 날개』, <와르데 알 하니>, <신부의 꽃가마> 등의 작품에서 두드러집니다.
3. 칼릴 지브란과 수피즘
수피즘의 신념이 우주적 영혼과, 삶과 죽음의 일체, 선과 악의 일체, 너와 나의 책임의 일체, 시간과 공간의 일체, 즐거움과 고통의 일체, 인간과 신의 일체에 대한 믿음으로 정의된다면 지브란은 분명 수피주의자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수피즘이 발전의 걸림돌이 되는 전통과 규범에 대한 혁명이며, 마지막 숨결까지 노동과 생산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라고 규정된다면 역시 지브란은 수피주의자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브란은 세상을 등지고 금욕적인 생활로 육체적 욕망을 억누르고 사는 수피즘은 거부하였습니다. 그는 사랑을 숭상하고 인간 본성의 선함을 믿었으며 이성과 감성의 조화를 주장하였습니다.
4. 종교·사회 개혁가 칼릴 지브란
앞서 언급한 지브란의 낭만주의와 수피즘은 항상 사회, 종교적 개혁의 목적을 뒤에 숨기고 있었습니다. 그와 동시대를 살았던 알-시드야끄, 부뜨루수 알-부스타니, 프란시스 마라쉬, 파라흐 안뚠 등의 문학가와 마찬가지로 지브란은 당시의 정치, 사회, 경제, 종교 구조에 저항했습니다. 이것은 제도의 굴레 속에서 고통받는 인간의 해방과 종속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지브란에게 자유란 지식과 완성의 첫 걸음인 것이라 하겠습니다.
5. 칼릴 지브란과 애국주의
지브란의 사상이 시공의 한계에 구애받지 않는 휴머니즘 추구에 있었다 할지라도 그의 사상 근저에는 조국 레바논에 대한 사랑이 깔려 있습니다. "나는 조국의 아름다움 때문에 조국을 그리워하고, 조국민들의 불행함 때문에 그들을 사랑합니다." 혹은 "나는 완벽한 절대주의자입니다. 절대주의는 국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나의 가슴은 시리아(*)를 향해 불타고 있습니다. 운명은 시리아에 가혹했습니다. 아니 가혹 이상이었습니다. 시리아의 신은 죽었습니다"라고 그는 조국을 언급할 때마다 조국에 대한 열정과 그리움, 조국민들의 고통과 낙후에 대한 연민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브란은 애국주의를 주창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민족과 국가간의 형재애와 평등을 항상 염두에 두었습니다. '조국이 남을 짓밟을 경우 나는 조국을 증오할 것'이라는 그의 애국주의는 분명 휴머니즘에 입각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 시리아 : 칼릴 지브란은 레바논 출신입니다. 그런데 간혹 그의 글에서 ‘나의, 조국 시리아’라고 표현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은 레바논이 외침을 받아 시리아에 병합되어 있었는데, 그때 레바논 국민들도 시리아 국적으로 분류 되었던 때문입니다. 참고적으로 레바논은 프랑스 통치 이후 1920년 시리아로부터 분리되었고, 1941년 프랑스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선포하였습니다.
※ 위 내용은 “이주문학 연구 - 지브란 칼릴 지브란을 중심으로”(조희선, 명지대 아랍문학과 교수)라는 논문과 여타 관련 서적을 참조하여 작성하였습니다.
◉ 칼릴 지브란과 니체의 작품 비교 분석
※ 운영자 주(註) : 여기서는 “칼릴 지브란과 니체의 작품 비교 분석”이라는 거창한 제목처럼 전문적 분석을 시도하려는 것이 아니라, 인용글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조희선
► 출처 : 『‘이주문학’ 연구』 ( 명지대 아랍어 아랍문학과 교수 / 1997년 12월 논문)
[예언자]의 틀이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모방한 것이라고 몇몇 학자들은 주장하고 있다. 니체의 대변인 짜라투스트라는 인간 세상 밖에서 온 사람으로 그들 가운데 거처하면서 자신의 지혜를 들려 준 후, 타향살이가 싫증이 나자 그가 소속된 '행복의 섬'으로 물러간다.
지브란은 대변인 알-무스따파 역시 인간 세상 밖에서 온 사람으로, 타향살이를 청산하고 자신이 태어난 섬으로 되돌아간다.
짜라투스트라가 제1편 마지막에서 제자들과 작별을 고할 때, "자, 이제 너희는 나를 잊고 너희 자신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너희 모두가 다 나를 배반한 다음에야 나는 너희에게 돌아온다."라고 말했듯이, 지브란의 알-무스따파 역시 자기 친구들에게 작별을 고하면서 "그러나 내 음성이 너희 귀에서 사라지고, 내 사랑이 너희 기억에서 멀어지는 날이 온다면, 그 때는 내가 다시 올 것이라"라고 비슷한 작별의 말을 건넨다.
지브란이 설혹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형식은 모방했을지라도 그 작품이 담고 있는 사상은 니체의 그것과 사뭇 다르다.(이상 335p)
그의 첫 영어 작품집 [광인] 역시 지브란의 종교적 색채를 띤 작품이다. 니체의 영향이 엿보이는 이 작품에서 '광인'은 짜라투스트라처럼 자신을 '외침'으로 소개한다.
짜라투스트라의 외침이 신의 죽음을 선포한 반면, 지브란의 '광인'의 외침은 창조에 관한 인간과 신의 협력 관계를 강조한 것이다.(이상 341p)
지브란의 <미친 요한나>, [선구자], [예언자] 등의 작품은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영향을 받은 작품으로 지브란은 메시아적 어조로 자신의 사상을 전달하는 방법과 제도화된 종교제도와 사회체제를 비난하는 형식을 니체에게서 빌어왔다.
그러나 지브란의 철학이 니체의 철학과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았다.
니체는 비관적 무신론자로 짜라투스트라로 하여금 신의 죽음을 선포한 반면, 지브란은 알-무스따파를 선과 선한 의지를 믿는 긍정적인 인물로 만들었다.(이상 344p)
[2] 수헤일 부쉬루이
► 출처 : 『아름다운 영혼의 순례자, 칼릴 지브란』 (이창희 옮김, 두레)
[예언자]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은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이다.
두 작품 모두 고상한 성경 구절과 금언, 삽입구, 경구를 많이 사용했다.
비록 니체의 예언자에서는 작가에 의해 신성이 배제되기는 하였으나, 지브란은 여전히 짜라투스트라를 상당한 영적 능력을 가진 예언자로 인식했다.
짜라투스트라는 자신의 "영혼과 고독"을 찾기 위해 사회를 버리고 산 속으로 들어가며, 세상 사람들에게 들려줄 지혜를 얻어 가지고 산을 내려온다.
이러한 예언자적 요소가 지브란에게 가장 강력한 동기가 되었다.
그는 [예언자]를 쓸 때, 니체의 허무주의 철학은 본받지 않았지만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그대로 모방했다. (339p)
[3] 이영선
► 출처 : 『사랑이 그대를 찾아오거든 가슴을 열어라』 (이영선 옮김, 책이있는 마을)
지브란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예언자]는 그의 내적 생활, 감정, 그리고 믿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작품은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문체를 따르고 있다.
지브란은 니체를 이 세상에 온 최고의 영혼으로 생각하였다.
하지만 니체는 무신론자인 반면, 지브란은 독신자였다.
이 작픔에 나온느 알무스타파는 지브란의 대변자이다.
[4] 서정윤
► 출처 : 『그대를 사랑하는 동안 내게는 우는 날이 많았습니다』 (서정윤, 문학수첩)
영어로 발표한 지브란의 첫 작품은 시와 비유를 모은 [미친 사람](1918)이다. 여기서 니체의 영향이 지브란의 문체에 나타난다. 니체와 마찬가지로, 지브란은 비유를 통해서 말한다. 지브란은 미친 사람도 차라투스트라처럼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에게 소개할 때 '고함'을 친다. 차라투스트라의 외침은 신들의 죽음의 선언이었다. 그러나 지브란의 미친 사람은 신들의 죽음을 선언하지 않고, 창조에 관하여 인간과 신 사이의 협력 관계를 강조한다. 책갈피를 넘기면서 우리는 역설과 냉소의 태도가 점점 노골화되다가 마지막 비유인 '완전한 세계'에서 그 절정에 이르는 것을 보고 놀라게 된다. 이 글은 '타락한 영혼들의 어떤 신'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위선적 형태를 다시 한번 단죄한다.
(중략)
지브란의 작품 가운데 특히 [예언자]가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문체를 고스란히 모방한 것이다. 그러나 알무스타파는 인간의 능력에 관해서 냉소하고 비관적인 차라투스라의 철학을 조금도 닮지 않았다.
[5] 오강남
► 출처 : 『예언자』 (오강남 옮김, 현암사, 2003년 4월)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는, 알릴랜드의 시인 조지 러셀에 의하면 인도의 시성 라빈드라나트 타고르가 쓴 시집 [기탄잘리] 이래 가장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한 동양 최고의 걸작이라고 합니다. 더러는 그것을 단테의 [신곡]이나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와 비견할 수 있는 작품이라고도 하고, 어떤 사람은 심지어 현대의 성서라고도 격찬합니다.(하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