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품 소개] 행렬(THE PROCESSION)
『예언자』는 영어로 쓴 칼릴 지브란의 대표작(1923년)입니다. 그런데 이보다 앞서 그 전조(前兆)인 『행렬(The Procession)』이 아랍어로 출판(1919년)되었습니다. The Procession은 ‘행렬’ 혹은 ‘행진’으로 번역할 수 있겠으나(아랍어로는 ‘알 마와킵’), 국내 번역서(범우사)에서는 “영가(詠歌)”라는 제목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인용하는 내용은 범우사에서 2001년 11월 15일에 발행(2판)한 『예언자·영가』 중에서 윤삼하 시인이 번역한 “영가”에서 발췌한 것입니다(각각 단독으로도 출판). 본래 이 책은 1982년 10월 30일에 초판을 펴냈으나, 2001년에 디자인을 개선하여 새 판을 냈습니다. 구판과 신판의 본문을 대조해 본 바에 의하면, 바뀐 내용은 거의 없으며 다만 일부 맞춤법과 극소수의 조사(助詞)만 수정한 것으로 보입니다. 번역시 참조한 영문판 원문은 "The Procession ; Philosophical Library(New York,1958)"이라고 합니다.
주요 목록을 살펴보면 “꿈 같은 세상, 착한 마음과 계급에 대하여, 삶과 슬픔에 대하여, 종교에 대하여, 정의에 대하여, 의지와 정의에 대하여, 학문과 지식에 대하여, 자유에 대하여, 행복과 희망에 대하여, 점잖음에 대하여, 사랑에 대하여(I, II), 영혼과 기름짐에 대하여(I, II), 죽음과 영원에 대하여, 젊은이의 노래, 현자의 각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행렬(혹은 영가)』은 한 늙은 현자(賢者)와 숲속에 야생(野生)하는 한 젊은이와의 대화 형식입니다. 젊은이는 자유와 기쁨과 자연에 대한 사랑을 노래하며 노인은 세상의 무익함을 한탄하고 있습니다. 젊은이가 말하는 부분의 운율은 활기차고 밝은 반면 현자의 운율은 좀 더 무겁고 설교조와 웅변조입니다.
◉ 지브란의 [The Procession]에 대하여 - G. 키릴라
1919년 지브란이 아랍어로 쓴 그의 숨은 걸작시 "The Procession"를 자비로 출판하자 그의 친구들은 모두 놀랐다. 종이와 체재, 삽화와 제본에 이르기까지 지브란은 이 독특한 책에 그의 모든 배려와 관심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의 아랍어는 섬세한 음영(陰影)이 감도는 기름진 어휘로서 강력한 힘을 지녔다. 온화하고 다채로운 문체 속에 그의 섬세한 어조는 리듬과 함께 하나의 교향악을 이루고 그 소리를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눈물과 황홀경으로 이끌어 준다. 산문이나 시가 낭독되는 어떤 아랍인의 모임에 가 본 사람은 누구든지 청중의 머리와 몸이 낭독에 따라 어떻게 율동적으로 움직이는가를 쉽게 눈여겨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 "The Procession"에서 지브란이 노래의 매력에 도취되고 슬픈 찬미가(Kasida) 속에 완전히 자신을 망각하여 다음을 잇지 못하는 것을 종종 보게 된다.
아랍의 천재 시인 나십 아리다(Nassib 'Arida)는 "The Procession"의 서문에서 어떻게 이원적(二元的)인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세상물정에 환하고 경험으로 원숙해진 한 늙은 현자(賢者)가 도시를 떠나 시골길을 헤매이다가 숲가에 앉아, 나른하게 쉬고 있을 때 햇볕에 까맣게 그을린 알몸뚱이의 한 젊은이가 숲속에서 나타나 손에 갈대 피리를 들고 현자 옆에 아무렇게나 몸을 던져 누움으로써 이들 두 사람의 대화는 아무런 격식도 없이 마음 터놓고 시작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현자는 신중한 논리와 실망감을 띠운 어조로서 자기의 지혜를 내쏟고 있는 반면에 반항적이며 고집 센 젊은이는 <전체>의 <보편성>에 대한 그의 표현들을 터뜨리고 있다.
나(역자)에겐 이 시가 지브란의 무의식적인 자서전을 나타내고 있는 듯이 보인다. 즉 나이를 초월하여 성숙된 현자 지브란과 모든 존재의 <통일성>과 <보편성>을 믿고 단순하고 일반적인 자유를 갈망하는 반항아 지브란은 모든 사물과 함께 뒤섞여 조화를 이룬다.
나는 이 시에 대한 비평적 연구를 감행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독자는 그의 술잔 --- 지적이며 정서적인 --- 에 따라 받아 마시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글과 그림의 거장인 지브란 자신이 이러한 매개물(시나 그림)의 불충분함을 느끼면서 각 후렴 끝에 차원을 초월하여 무한한 매개물인 갈대 피리 소리나 영혼의 실재 속에 도피하고 말기 때문이다.
《지브란의 일생》을 읽어 본 독자는 <신성한 계곡>과 마르사키스와 평화를 갈망하던 그를 알 것이며 다음과 같은, 반항적인 자연의 아이가 갖고 있는 철학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피리를 주세요. 노래를 부르세요!
모든 재난도 구제도 잊으세요.
인간이란 작은 시냇물 위에 쓰여진
몇 줄의 시에 지나지 않습니다.
대답해 주세요.
군중들이 믿고 닥치는 곳.
그 논쟁의 소요 속에
주장과 끊임벗는 투쟁 속에
무슨 이익이 있는 것입니까?
어둠 속에 굴을 파는 두더지처럼
거미줄을 움켜 잡고
항상 야망이 가로 누운 곳.
산 자와 죽은 자가 서로 만날 때까지.
그런가 하면 자비로우면서도, 상심하여 실망에 빠진 지브란은 이렇게 체념을 한다.
손으로 잡아당길 수 있는 세월이 있다면,
그것들을 모두 숲속에 뿌려 두리라.
그러나 우리는 환경의 지배를 받아
운명의 신이 열어 놓은 좁은 길을 갈 수밖에.
운명은 우리가 바꿀 수 없는 길.
나약함이 우리의 의지를 좀먹고
우리는 자신에게 변명을 덧대어
운명이 우리를 죽이도록 도와 줄 뿐.
◉ 내용 보기
► 삶과 슬픔에 대하여
현자
삶은 꿈에 뒤척이며 의지에 자극받는 잠에 지나지 않네.
슬퍼하는 영혼은 그의 비밀을 감추고
기뻐하는 자 또한 몸을 부르르 떠네.
젊은이
숲속에는 아무도 슬퍼하지 않습니다.
슬픔으로 고개를 파묻는 자도 없습니다.
서풍(譯註 : 솔솔부는 바람. 서풍(西風)의 신 Aephyr)이 잎사귀에 속삭이며 자비를 실어다 주니까요.
피리를 주세요. 노래를 부르세요!
노래가 슬픔을 지워주도록
어제와 내일이 다시 만나는 날.
서러운 피리소리만 남게 됩니다.
► 정의에 대하여
현자
이 땅 위에 정의란 말이 잘못 쓰이고 있음을 진(역주 : Jinn, 아랍어로 악마, 귀신)은 슬퍼하리라.
죽은 자들도 이것을 보고
세상의 공정함을 비웃으리라.
그렇다. 우리는 사소한 범죄자들에게
죽음과 감옥의 형벌을 주면서
보다 큰 노략질에는 명예와 재산
그리고 모든 존경을 바치고 있나니.
우리는 한송이 꽃을 훔치는 자를 천하게 여기고
온 들을 강탈한 자는 기사도라 하나니
육신을 죽인 자는 죽어야하고
영혼을 죽인 자는 풀려나도다.
젊은이
광야엔 정의도 형벌도 없습니다.
버들가지들이 얽혀 땅 위에 그림자를 던질 때
아무도 삼(杉)나무가 하는 말을 듣지 못합니다.
"이런 짓은 법과 정의에 거슬리는 짓이다"라고 하는.
우리들 인간의 정의는
따뜻한 햇볕 속에 부끄러워 눈처럼 녹아버리고 맙니다.
피리를 주세요. 노래를 부르세요!
가슴에 닿은 노래는 장엄한 심판.
죄와 벌이 끝난 후에도
서러운 피리소리만이 남아 있습니다.
► 자유에 대하여
현자
지상에서 자유로운 자는
자신을 속박하기 위하여
애써 감옥을 짓네.
자신의 동족에서 벗어나
사상과 사랑의 애무에 노예가 될 때.
젊은이
숲속에는 자유인이 살지 않습니다.
비천한 노예도 없습니다.
영광이란 파도 위의 물거품처럼
거짓 망상일 따름.
아아먼드[扁桃]가 발 아래 잔디 위에
꽃을 뿌린다 해도
결코 지배자라 뽐내지도 않고
풀더러 절을 하라고 업신여기지도 않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