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품 소개] 계곡의 님프들(NYMPHS OF THE VALLEY)
1. 개관
1906년 무렵 칼릴 지브란은 종교의 합일을 부르짖음과 동시에 교회와 정부의 횡포를 두려움 없이 공격했고, 신선하고 열정에 넘치는 그의 글은 독자들을 사로잡았습니다. 이 기간에 그가 쓴 3개의 이야기인 <마르타>, <미친 유한나>, <천년의 먼지와 영원한 불> 등은 나중에(1948) 『계곡의 님프들(NYMPHS OF THE VALLEY)』이라는 제목으로 한데 묶어 출판되었습니다.
2. 간략 내용
<마르타>(마타, 마아타)는 중동 지역의 여성에게 가해지는 억압, 자연과 도시의 대조, 시골과 도시의 대조를 그리고 있습니다. 그가 초기부터 일관성 있게 주장한 것은 워즈워스의 믿음과 같은 것으로, 각성한 인류는 자연이 스승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리라는 생각이었습니다.
<미친 유한나>(광인 유한나)는 중동의 부패, 착취, 위선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 이후 지브란의 글에서는 점점 광인(狂人)이 자주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천년의 먼지와 영원한 불>은 윤회와 예정된 사랑을 다루고 있는데, 여기서 '사랑'은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을 의미합니다.
3. 국내 번역서
국내에 번역된 『NYMPHS OF THE VALLEY』는 '계곡의 님프들' 혹은 '계곡의 님프(요정)'라는 제목을 달고 있습니다. 약간 오래된 번역서로는 먼저 도서출판 당그래에서 출판된 『반항하는 정신』(이경하 옮김, 1991)을 들 수 있겠는데, 이 책에는 <狂人 유한나>와 <마르타>가 실려있습니다. 두번째로, 문성당에서 발행된(1990.3.5) 칼릴 지브란 선집 『나는 영혼이 속삭이는 진실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김정숙 옮김)에는 <마르타>(이 책에서는 '마아타'라고 표현하고 있음)가 실려 있습니다. 또한 지문사에서 발행된(1990.6.15) 『신부의 침대』(홍성희 옮김)에는 <시대의 재와 영원의 불>(=천년의 먼지와 영원한 불)이 실려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 책은 절판된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리고 2000년 11월 26일 발행된 『사랑이 그대를 찾아오거든 가슴을 열어라』(칼릴 지브란 대표 작품 선집, 이영선 옮김, 책이있는마을)에는 "계곡의 요정(Nymphs of the Valley)]"이 실려있는데, 내용은 "마타의 전설 1,2"(마르타)만 실려 있습니다.
위의 작품 소개글은 『아름다운 영혼의 순례자, 칼릴지브란』(수헤일 부쉬루이 지음, 이창희 옮김)과 다른 책 등을 참조하여 작성한 것입니다. 그리고 아래에 소개하는 내용은 『반항하는 정신』(도서출판 당그래, 이경하 옮김)에 실려 있는 것을 참조하였습니다(이 책에는 여러 작품이 수록되어 있음). 다만 유의할 점은 이 책에서 번역한 내용은 원본을 약간 줄인 것으로 판단됩니다. 그런데 덕수출판의 『영혼을 위한 기도』(박광원 엮음, 1999년 4월 발행)에도 동일한 내용이 실려있습니다(이전의 책들에서 모아 묶은 듯합니다). 그러나 이 책은 상당한 오류가 발견되고 있으며(내용보다는 분류가 부정확), 2002년에 『달콤한 독』(C&G)이라는 제명으로 다시 발행되고 있으나 구판의 문제를 여전히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 외에 일부 선집(選集)에서 『NYMPHS OF THE VALLEY』의 내용을 일부 포함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단편적으로만 수록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 마르타
창녀가 되어야 했던 순결한 한 영혼의 이야기
1
갓나서 아버지를 여의고, 열 살이 되기 전 어머니마저 잃어 고아가 된 소녀는 가난한 이웃집에 얹혀, 레바논 산골짜기 외딴 마을에서 자랐다.
아버지가 남겨 준 것이라곤 마르타란 이름뿐이었고, 어머니에게서는 슬픔의 눈물만을 물려받았다.
자기가 태어난 땅이건만, 마르타에게는 언제나 낯설기만 했다.
아침이면 마르타는 다 해어진 헌 옷을 걸치고 맨발로 젖소를 몰고서 들로 나갔다. 한낮이 되면 마르타는 풀이 무성한 골짜기 나무 그늘에 앉아 산새들의 노래에 귀기울이며, 꽃과 나비에게 눈길을 주다가도 굶주릴 걱정이 없는 젖소를 마냥 부러워하면서, 흐르는 시냇물에 하염없는 눈물을 흘려야 했다.
지평선 저 너머로 해가 지고, 견딜 수 없이 배가 고파 오면, 마르타는 오두막 집으로 돌아와 주인집 딸 곁에 앉아서 마른 옥수수 빵조각과 먹다 남긴 과일껍질을 허겁지겁 먹고서는 헛간 땅바닥에 볏짚을 깔고 누워, 꿈도 꾸지 않고 다시는 깨지도 않을 길고 깊은 잠이 들기를 바라면서 눈을 감았다.
그러나 새벽이 되면 마르타는 다시 주인 아저씨의 거친 발길에 채어 단잠을 깨야만 했다. 가엾은 소녀 마르타는 이렇게 어린 시절을 두메산골 눈물의 골짜기에서 보냈다.
이처럼 불우한 소녀에게도 봄은 찾아오는 걸까?
마르타는 가슴 속엔 이전에 느껴 보지 못한 감정이 싹트고 있었다.
풀내음 꽃향기에 가슴이 울렁이고 야릇한 생각에 꿈이 부풀었다.
어느새 소녀가 여인이 되고 있는 증거일까?
착하고 순결한 소녀의 외로운 영혼이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따라 산골짜기를 유랑하게 된 것이 누구의 섭리에서이며, 어떤 운명에서인지는 알 수 없어도, 태양과 지구 사이에 사는 어느 미지의 신의 그림자처럼, 마르타는 인적이 드문 외딴 곳으로만 떠돌았다.
복잡하고 붐비는 도시에서만 살아 온 우리는 저 깊은 산골짜기 두메 마을사람들의 삶을 알지 못한다. 현대문명의 흐름 속에 떠밀려 가고 있는 우리는 정결한 마음의 여유나 단순한 삶의 아름다움을 모르고 산다.
우리는 소음과 먼지 속에서 보고 듣는 것 없어도, 저들 시골 사람들은 대자연의 갖가지 조화 속에서 풀잎에 반짝이는 아침 이슬을 보고, 나뭇잎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우리는 많은 것을 뿌리나 거두는 것 없으되, 저들은 그들이 뿌리는 것을 또한 거두지 않는가? 또 우리는 우리 자신의 욕망의 노예로되, 저들은 자족함을 아는 그들 스스로의 주인이 아닌가? 아아-- 우리는 절망과 두려움으로 탁해진 인생의 괴로움이 엉긴 쓴 잔을 들되, 저들은 맑은 삶의 단물을 마시지 않는가?
마르타는 가슴 부푸는 열여섯 살이 되었다.
그녀의 영혼은 들판에 벌어지는 온갖 아름다움을 비춰 주는 맑게 닦인 거울과 같고, 그녀의 마음은 모든 소리를 메아리쳐 주는 깊은 골짜기와 같았다.
삼라만상이 애조를 띤 어느 가을날, 노랗게 물든 나뭇잎들이 낙엽지는 것을 바라보면서, 마르타는 샘 곁에 앉아 죽음이 인간의 생명을 농락하듯 바람이 마뭇잎을 희롱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때 갑자기 골짜기의 부서진 돌멩이를 튕기는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이어서 말 탄 남자가 가까이 다가왔다.
옷차림으로 보아 부유한 사람이라는 걸 이내 알 수 있었다.
말에서 뛰어내린 그는 마르타가 지금까지 아무에게서도 들어 보지 못했던 부드러운 음성으로,
"도중에 그만 길을 잃었습니다. 해변으로 가는 길을 좀 일러 주시겠습니까?"하고 물었다.
마르타는 샘가의 어린 나무가지처럼 똑바로 고추 서서 대답했다.
"저는 모르겠어요. 저의 집 어른에게 가서 물어 보고 오지요."
마르타가 길을 물으러 가려 하자,
"아니, 가지 마십시오."
하고 말하는 사나이의 눈빛이 갑자기 불타올랐다.
마르타는 그대로 멈춰섰다. 이상하게도 사나이의 음성에서 자기를 꼼짝도 못하게 하는 힘을 느꼈기 때문이다.
마르타는 사나이를 한 번 쳐다보았다.
그는 마르타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바라보는 뜻을 마르타는 알 수가 없었다.
사나이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마르타는 그 달콤한 미소에 그만 매혹되어 버렸다.
사나이는 사랑스럽다는듯 마르타의 벗은 발과 어여쁜 손목과 매끄러운 목, 부드럽고 숱이 많은 머리를 살펴 보았다. 타오르는 눈으로 마르타의 햇볕에 그을려 아름답게 빛나는 피부를 눈여겨 본 것이다.
그래도 마르타는 수줍어하며 잠자코 서 있었다. 그녀는 그 자리를 떠나고 싶지도 않았고, 이상하게도 말을 할 기력조차 없어진듯 싶었다.
그날 저녁 마르타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단지 젖소들만이 우리로 돌아왔을 뿐.
주인 아저씨가 밭에서 돌아와 마르타가 돌아오지 않은 것을 알고는, 골짜기마다 찾아 보았으나 허사였다. 마르타의 이름을 소리쳐 불러 보아도 깊은 동굴에서 울려나오는 메아리와 나무들 사이로 부는 바람소리 외에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는 잃어버린 마르타를 가엾게 여기면서 집으로 되돌아왔다.
부인은 지난밤 마르타가 사나운 들짐승의 발톱에 갈기갈기 찢기는 꿈을 꾸었다고 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이것이 내가 저 작고 아름다운 산골짜기 마을에서 들은 마르타에 관한 이야기다. 마르타가 갓 낳았을 적부터 마르타를 잘 아는 마을 노인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의 전부다.
마르타는 이렇게 유리창에 서린 어린아이의 숨결처럼 스쳐간 애처로운 기억외에는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이 외딴 산골짜기 조그만 마을로부터 사라졌던 것이다.
2
북부 레바논에서 대학의 여름방학을 보낸 후인 1900년 가을, 나는 베이루트로 돌아왔다.
가을 학기 강의가 시작되기 전에, 나는 몇몇 친구들과 함께 한 주일 동안 평소 집에서나 강의실에서 학과에 쫓겨 맛보지 못하던 자유를 만끽하면서 시내를 두루 돌아다녔다. 마치 닫혔던 새장의 문이 열려 자유스러워진 새가 탈출의 기쁨으로 여기저기 마구 날아보듯이------.
청춘은 진정 아름다운 꿈.
하지만 그 꿈의 감미로움도 책과 씨름하다 보면 자칫 무의미해지고, 그러다 그 꿈에서 깨어나면 거칠고 삭막한 세계를 만나 환멸의 비애를 맛보게 된다.
젊은 시절의 아름다운 꿈들을 현실과 잘 조화시켜, 평생토록 우리들 마음 속에 쉬임없이 배움의 희열을 누릴 수는 없을까?
자연, 바로 그것이 인간의 스승이 되고, 삶 그것이 바로 책이 되고, 인생 그 자체가 학교가 되는 시대가 언제나 우리에게 올까?
하늘로 향해 뻗어나는 나무들처럼, 우리 인간도 늘 위로 향한 정신의 성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나는 절실히 느낀다.
창조의 아름다움에 대한 깊은 이해와 사랑으로 우리의 영혼이 또한 성장할 것이고, 진정한 우리의 행복을 여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나는 갖는다.
어느날 저녁 나는 하숙집 문앞에 앉아 지나가는 행인들을 바라보면서, 장사꾼들이 저마다 제 물건이 제일 좋다고 외쳐대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이때 한 어린아이가 내게로 다가왔다. 한 다섯 살쯤 되었을까? 다 해진 옷을 입은 이 아이는 어깨에 저보다 더 큰 꽃바구니를 메고 있었다.
갸날프고 좀 쉰 듯한 목소리로, 소년은 나에게 꽃 한 송이만 사 달라고 했다. 그의 핏기 잃은 얼굴 풀죽어 어두운 두 눈을 들여다 보면서, 나는 측은한 마음에 조금 웃어 주었다. 그것은 마음 속 싶은 데서 나오는 눈물이 뒤섞인 조용한 웃음이었다.
나는 그의 꽃을 몇 송이 샀다.
그러나 내가 정말 사고 싶었던 것은 한창 부모의 사랑을 받고 곱게 자랄 나이에 길거리에 나와서 꽃을 팔아야만 하는 이 어린아이의 슬픈 사연 때문이었다. 언제 어디에나 가난한 사람들의 비극은 흔한 일이라 좀처럼 눈에 보이지 않지만, 웬일인지 이 어린아이의 시무룩한 표정 뒤에 씌어 있을 슬픈 이야기를 알고 싶었다.
내가 그에게 친절한 말을 건네자, 그는 의아한듯 나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항상 들어 온 거칠고 심한 말들에 익숙해 있을 뿐 동정하고 감싸주는 따뜻한 말에는 익숙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나는 그의 이름을 물었다.
"후아드예요."
소년은 땅을 내려다보면서 대답했다.
"부모님은?"
"마르타의 아들이예요."
"아버지는?"
아버지라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아이처럼 고개를 저었다.
"후아드, 그러면 어머니는 어디 계시지?"
"집에요, 엄마는 아파요."
소녀의 입에서 나온 이 몇 마디 말이 나의 귓전을 때렸다.
마음 속 깊은 데서 이상하고 서글픈 감정이 북받쳤다.
그럼 이 아이가 바로 그 언젠가 저 외딴 산골 마을에서 들은 적이 있는 소녀 마르타의 자식인가? 불우했던 소녀 마르타가 지금은 베이루트에서 병고에 신음하고 있단 말인가?
산마을 골짜기에서 젖소를 지키면서 어린 시절을 보낸 고아 소녀가 부패한 문명의 조류를 타고 끝내 비참과 불행의 손아귀에 희생이 되어 버렸단 말인가?
이런생각들이 내 머리를 스치는 동안, 이 어린 소년은 나를 줄곧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순진한 마음의 눈은 내 아파하는 마음을 읽을 수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의 손을 잡고 말했다.
"너의 어머니를 만나 보고 싶은데 같이 좀 가자."
소년은 좀 이상하다는 듯, 그러나 아무 말 없이 내 앞을 서서 길을 안내했다. 가다가는 내가 자기 뒤에 오고 있나 확인이라도 하려는듯 뒤를 돌아도 보곤 했다.
우리는 더러운 거리를 내처 걸었다. 공기는 탁했고, 곧 쓰러질듯한 낡은 집들이 늘어서 있었다.
이윽고 우리가 이 음침한 도시 변두리에 이르자, 그는 오랜 세월의 풍상으로 다 무너지고 한 모퉁이만 앙상히 남은 누추한 집으로 들어갔다. 어린 소년을 따라 집 안으로 들어서자, 내 심장은 급히 뛰기 시작했다.
방 안 공기는 음습했고, 가구라곤 약한 불빛으로 어둠 속을 희미하게 비춰주는 램프와, 가난과 빈곤 궁핍을 말해 주는 침상뿐이었다.
침상에는 얼굴을 벽쪽으로 향한 채 잠든 여인이 누워 있었다. 무정하고 모진 세상에서 피난처를 찾듯, 아니면 차디찬 돌벽에서 인간의 마음보다는 한결 더 따사로움을 느끼기라도 하는 것처럼.
소년은 "엄마, 엄마" 부르면서 여인 곁으로 갔다.
여인은 고개를 돌려 나를 가리키고 있는 아들을 보았다. 여인은 오랜 세월의 수난에 찌들인 목소리로 울부짖듯 말했다.
"무엇을 원하시는 건가요? 당신의 욕정 때문에, 내 생명의 마지막 한 오라기까지 사서 나를 욕되게 하시려는 건가요?
가세요. 거리에는 육체와 영혼을 함께 값싸게 파는 여자들이 수두룩해요. 하지만 나는 이제 팔 게 없어요. 죽음이 곧 나를 데려가려 하고 있어요."
나는 여인이 누워 있는 침상 곁으로 다가갔다.
여인의 말은 마음 속 깊이 나를 감동시켰다.
슬픔이 압축된 애절함 때문에, 나는 여인에게 슬퍼하는 마음이 잘 전달되길 바라면서 말했다.
"나를 두려워 마십시오. 먹이를 찾아 헤매는 짐승이 아니라, 슬퍼하는 사람으로서 여기 찾아온 것입니다. 나도 산림이 울창한 숲속 산골짜기 마을에서 자란 시골 사람입니다. 마르타, 나를 두려워 하지 마십시오."
여인은 내 말에 귀기울였고, 내 말이 마음 속 깊은 데서부터 나오는 것인 줄을 알았는지, 그녀는 겨울 바람에 앙상히 남은 나무가지처럼 몸을 떨었다. 그리고는 옛날의 두렵고 쓰디쓴 기억에서 자신을 숨기고 싶었는지,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한숨 서린 침묵이 흐른 뒤, 떨리는 두 어깨 사이로 여인의 얼굴이 다시 나타났다. 여인의 움푹 패인 두 눈은 방 안의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를 응시했고, 여인의 마른 두 입술은 절망으로 떨리고 있었다.
다가오는 죽음이 목구멍 속에서 끄르륵거리고, 깊은 신음소리가 단속적으로 흘러나왔다.
여인은 숨차하면서 말을 꺼냈다.
"당신은 친절과 동정에서 저를 찾아오셨군요. 죄많은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길잃은 사람을 가엾게 여기는 것이 훌륭한 일임엔 틀림없겠지요. 그렇지만 어서 이곳을 떠나 당신이 오신 곳으로 돌아가 주세요. 잠시라도 이곳에 계심으로 해서 당신은 수치를 당할 것이고, 저에 대한 연민으로 해서 세상 사람들로부터 모욕과 멸시를 받게 될 뿐이니까. 이 더럽고 추한 방에 계신 것을 아무도 보기 전에 어서 돌아가세요.
어떤 행인도 당신을 알아보지 못하도록 외투로 얼굴을 가리시고 발걸음을 빨리 하세요. 당신의 가슴을 메우고 있는 연민의 정이 저의 순결을 되찾아 주지는 못할 것이요, 저의 죄를 씻어 주지도 못 할 것이며, 죽음의 거센 손길을 제게서 거두어 주지도 못할 것입니다.
어리석었던 죄로 저는 이 어둡고 깊은 나락에 떨어지게 된 걸요. 당신의 동정심으로 스스로를 욕되게 하지 마십시오. 저는 죽은 거나 다름없는 목숨이에요.
저를 가까이 마십시오. 사람들이 당신을 더럽다고 멀리하려 들거예요. 어서 돌아가세요. 저 맑고 아름다운 산골짜기 마을에 돌아 가시더라도, 제 이름은 입밖에도 내지 말아 주세요.
그래도 저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된다면, 저주받은 마르타는 죽었다고 말씀해 주시고, 다른 말은 아무 말씀도 하지 말아 주세요."
여인은 말을 멈추고, 아들의 조그만 두 손에 입을 맞추었다.
한숨을 길게 내쉬고, 여인은 다시 말을 이었다.
"사람들은 내 아들을 멸시하고 조롱하면서 '이 아이는 죄의 씨', '창녀 마르타의 아들', '사생아'라고 하겠지요. 어디 그뿐이겠어요? 더 심한 말도 하겠지요.
그들은 결코 이 아이의 엄마가 고뇌와 눈물로 그의 생애를 정화시키고 속죄한 것을 알지 못하겠지요.
나는 이 어린것을 무정한 세상에 외로운 고아로 버려 둔 채 죽습니다. 그러나 이 아이가 겁장이고 약골이면 스스로를 부끄러워할 것이고, 용기있고 의롭다면 피가 끊어 분노하겠지요.
하느님이 이 아이를 보호하시어 의롭고 용기있는 남자로 크게 해 주신다면, 그는 맹세코 하느님의 도움으로 자기와 자기 엄마를 학대하고 불행하게 만든 자들에게 굴복하지 않고 맞서서 싸우게 될 것입니다. 그랬다가 언젠가 이 고뇌에 찬 세상에서 해방되어 죽게 되는 날, 빛과 안식이 있는 저 세상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을 나를 다시 만나게 될 거예요."
"마르타, 당신은 스스로 죄인이라 하지만, 당신은 결코 죄인이 아닙니다. 비록 인생이 당신을 불경한 자의 수중에 두었다 할지라도 당신은 결코 불결하지 않습니다. 육신의 찌쩌기는 순결한 영혼에 손을 뻗어 미칠 수 없고, 눈더미가 살아 이는 씨앗의 생명을 앗아갈 수 없습니다.
인생이란 우리 영혼의 이삭들이 타작되는 마당입니다. 이 슬픔의 타작마당을 거치지 않는 이삭은 땅의 개미가 물어가고 하늘의 새들이 쪼아가, 결코 주인의 창고로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마르타, 당신은 짓밟힌 분입니다.
남을 짓밟는 자가 되느니보다 짓밟힘을 당하는 자가 되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세력 있는 자가 되어 남의 청춘과 인생을 짓밟고 망치느니보다 약한 인간 본능에 희생되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영혼은 신의 목걸이에 달린 한 개의 고리, 비록 사나운 불길이 그 모양을 비틀어, 둥글고 아름다운 형상을 찌그러뜨릴지는 몰라도, 그 본성을 변화시킬 수는 없으니까요.
그것은 오히려 전보다 더 빛나게 만듭니다.
당신은 인간의 탈을 쓴 짐승의 발굽에 짓밟힌 한 송이 꽃입니다.
비록 폭악한 발굽이 당신을 짓밟았을지라도,정의와 자비의 근원인 하늘로 피어오르는 당신의 슬픔과, 어린 고아의 울음과, 한 젊은이의 한숨이 담긴 향기는 소멸시키지 못할 것입니다.
마르타, 당신은 짓밟힌 꽃이요, 꽃을 짓밟은 발굽이 아닙니다. 그것으로 위로를 삼으십시오."
내 말에 여인은 한결같이 귀를 기울였다.
여인의 얼굴엔 석양에 구름이 낙조를 띄우듯 위안의 빛이 떠 올랐다. 여인은 나에게 자기 곁에 앉으라고 몸짓했다. 나는 여인의 곁에 앉았다. 여인의 표정에는 임종이 가까움을 아는듯 짙은 애조가 서려 있었다.
그것은 다 부서져 못 쓰게 된 침상 곁에서 죽음이 제자리걸음하고 있는 것을 느끼고 있는 표정이었다. 그것은 바로 기진맥진하여 생존의 사슬에서 풀리기를 기다리고 있는 여인의 모습이었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흐른 뒤, 여인은 얼마 남지 않은 기운을 모두어 말을 계속했다. 여인의 말에는 눈물이 섞여 있었고, 숨결마다 여인의 슬픔이 차 있었다.
"네, 저는 남자들 속에 숨어 있는 짐승의 밥이었어요. 짓밟힌 꽃입니다. 저는 그가 말을 타고 지나갈 때 샘가에 앉아 있었어요.
그는 친절히 말을 걸어오고는 저보고 아름답다고 했습니다. 저를 버리지 않겠다고 했지요. 그리고는 산골짜기는 새는 짐승이 사는 곳이라고 말하면서, 저를 가슴에 안고 입맞춤을 했습니다. 저는 고아로 자란 까닭에 그때껏 어느 누구에게서도 입맞춤을 받아 본 일이 없었어요.
그는 자기 말 뒷잔등에 저를 올려 태우고 도시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어느 아담한 집으로 데려갔습니다. 그리고는 제게 값진 옷과 향수와 맛있는 음식을 주었습니다. 미소를 지으면서 이 모든 것을 주었지요.
그러나 그의 다정한 말과 자애로움 뒤에는 야수와 같은 욕정이 숨겨져 있었어요. 저의 몸과 마음을 한껏 즐기고, 제 몸 속에 새 생명까지 심어 놓고서, 그는 떠나가 버렸어요.
새 생명은 빨리도 자라나 세상의 빛을 보았고, 저는 눈물로 나날을 지냈습니다. 외로운 집에 저와 젖먹이 어린 것을 굶주림과 추위 속에 내버려 두고 떠나가 버린 그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저는 슬픔과 뉘우침으로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러던 중 그의 친구들이 저 있는 곳을 알게 되고, 저의 궁핌과 약점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 둘 번갈아 찾아와서는 돈으로 제 몸을 샀습니다. 저를 욕되게 하고는 빵을 주었지요.
아, 몇 번인가 제 손으로 목숨을 끊으려 했지만, 그만두고 말았어요. 제 목숨은 저 하나만의 것이 아니었으니까요. 아기가 제 생명의 일부였기 때문이지요. 이제 마지막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다시 한번 무거운 침묵이 흐른 뒤, 여인은 죽음의 빛이 덮인 눈을 치켜뜨고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하느님, 육신을 떠나는 제 영혼의 부르짖음을 들어 주옵소서. 비옵과 바라오건대, 저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당신의 오른손으로 저의 자식을 지켜주시고, 당신의 왼손으로 저의 영혼을 받아 주옵소서."
기운이 다한듯 여인의 숨소리가 약했졌다.
비통하고 애절하게 아들을 바라보면서 천천히 눈을 내리뜨고, 여인은 침묵에 가까운 낮은 음성으로 입술을 움직였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을 거룩하게 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여인의 음성이 멎었다.
여인의 입술은 잠시 계속 움직였다.
한번 큰 숨을 쉬더니, 곧 얼굴이 창백해졌다.
숨을 거둔 것이다.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를 응시한 채로------
새벽녘이 되어 마르타는 나무로 짠 관에 입관되었고, 두 가난한 사람의 어깨에 메어져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황폐한 들에 묻혔다. 하지만 여인의 죽음에 명복을 빌어 줄 승려도 없었고, 십자가가 세워지는 묘지에 잠들 수도 없었다.
여인의 어린 아들과 삶의 고달픔에서 연민을 배운 또 하나의 젊은이 외에는, 아무도 장지까지 따라가 슬퍼해 주는 이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