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소개] 『칼릴 지브란의 러브레터』
이 서간집 『칼릴 지브란의 러브레터』는 칼릴 지브란(1883~1931)과 마이 지아다(메이 지아다, May Ziadeh, 1886-1941)가 약 20년 간 서로 단 한 번도 얼굴을 마주하지 않고 주고 받았던 편지 중에서 칼릴 지브란의 것만을 간추려 묶은 것입니다. 마이 지아다의 편지는 가족들의 반대로 지금 현재 접할 길이 없다고 합니다. 이 책은 수헤일 부쉬루이, 슐마 하피 알-쿠즈바리가 엮은 것을 공경희가 번역했고 명진출판(주)에서 2001년 1월 15일 펴냈습니다.
이 책에서 소개하는 편지는 총 37편으로서 1914년 1월 2일부터 1930년 12월 17일까지의 것입니다. 이 편지를 통해 그동안 다른 책에서는 볼 수 없었던 지브란의 새로운 면을 엿볼수 있어 폭넓은 이해가 가능합니다. 원래 이 편지들은 아랍어로 쓴 것이지만, 엮은이가 영어로 번역했고, 또다시 공경희가 번역하면서 영역본을 우리말로 번역한 것입니다.
보통 칼릴 지브란과 관련된 여인을 떠올리면 M.E.H가 먼저 생각날 것입니다만, 마이 지아다도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들의 관계는 연인으로서의 사랑이 아니라 문학적인 면에 더 치우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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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1] 뉴욕, 1914년 1월 2일
친애하는 지아다 양에게(1)
당신에게서 아무런 소식이나 편지도 받지 못한 채 침묵 속에서 지내야 했던 지난 몇 달 동안, 저는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한 번도 당신이 '사악하다'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이제 제게 자신의 영혼이 사악하다고 고백하십니다. 당신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믿고 신뢰하는 저로서는, 당신의 그 고백이 옳고 적절하다고 믿어 드릴 수밖에 없겠지요. 물론 "저는 사악합니다"라는 당신의 고백 속에는 강한 자존심이 있음을 압니다.
그리고 그 사악함이야말로 힘과 영향력 면에서 선함과 겨룰 만한 것이기에 당신의 그러한 자존심 또한 정당한 것이겠지요. 하지만 당신의 사악함이 아무리 깊다 하더라도 저의 사악함의 반밖에 되지 못하리란 것을 저 역시 고백하지 않을 수 없군요. 저야말로 지옥의 동굴 속에 거하는 요괴만큼이나 사악한 인물이니까요. 아니 검은 영혼을 지닌 지옥의 수문장처럼 사악한 사람이 바로 접니다. 아마 당신도 제 말을 믿어 주시겠지요.
하지만 아직까지도 당신이 왜 '사악함'을 저에 대한 '무기'로 사용할 마음을 갖게 되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 이유를 설명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저는 당신이 보내 주신 편지에 일일이 답장해 왔으며, 당신이 제 귀에 속삭여 주신 모든 말의 의미를 계속해서 찬찬히 곱씹어 보고 있습니다. 혹여 제가 잘못한 일이라도 있는 건가요? 제게 벌을 가하는 힘을 보여 주기 위해 '죄'를 떠올려 말씀하신 것은 아닌지요? 그렇다면 그대는 대단한 성공을 거두셨습니다.
저는 당신의 '본질'(2)이 인도의 여신 칼리의 칼과 그리스인이 숭배하는 다이애나 여신의 화살을 한데 합한 것이라는 사실을 믿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이제 서로 상대방의 영혼이 얼마나 사악한가와 벌 주고 싶어하는 마음을 알았으니, 이 년 전 시작했던 대화를 다시 시작해 볼까요.
일은 잘되어 가나요? 건강은 괜찮으십니까? 활기차게 지내시는지 모르겠습니다. 혹시 지난 여름에 다른 팔마저 골절이 되신 건 아닌지, 아니면 온전한 팔로 이집트로 돌아가게 하려고 어머니께서 승마를 완전히 금지하신 건 아닙니까? 제 얘길 하자면, 저의 건강 상태는 술 취한 사람의 갈지자걸음 마냥 왔다갔다합니다. 지난 여름과 가을에는 높은 산과 바닷가를 오가며 여행을 했습니다. 그리고 야위고 파리한 모습으로 뉴욕에 돌아와 다시 꿈을 붙잡고 발버둥을 치고 있습니다.
그 이상한 꿈들은 저를 높은 산 정상에 올려놓았다가 깊고 깊은 계곡에 메다꽂곤 하지요.
《알-푸눈》(3)이 마음에 드신다니 기쁩니다. 아랍권에서 발행하는 간행물 중 《알-푸눈》이 단연 최고지요. 그 발행자는 성품이 좋은 젊은이로, 생각이 명료하여 문장도 명쾌한 사람입니다. 그는 '알리프'라는 필명으로 독창적인 시집을 출판한 적도 있습니다. 이 젊은이의 놀라운 점은, 유럽인들이 펴낸 글을 모두 읽을 뿐 아니라, 하나같이 잘 이해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들의 친구 아민 리하니(4)로 말할 것 같으면 《알-푸눈》에 신작 장편 소설을 게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대부분의 장을 제게 읽어 주고 있는데, 정말 아름답습니다. 《알-푸눈》의 발행인에게 제가 당신을 대신해서 글을 주겠다고 말했더니, 매우 기뻐하며 기대하는 것 같더군요.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저는 다룰 줄 아는 악기가 없습니다만, 인생을 사랑하는 것만큼이나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특히 음악의 역사와 기원과 발전에 대한 지식을 쌓고, 음악의 기본 원칙과 구조를 배우는 데 열심이지요. 앞으로 오래 살 수 있다면, 아랍과 페르시아의 작곡에 관한 긴 에세이를 쓸 생각입니다. 저는 서양 음악과 동양 음악을 똑같이 좋아합니다. 그리고 일 주일에 한 두 차례는 언제나 오페라를 관람하지요. 하지만 오페라보다는 심포니나 소나타, 칸타타를 더 좋아합니다.
오페라에는 예술적인 소박함이 결여되어 있는 것 같아서요. 저는 소박한 걸 좋아하고 그렇지 않은 걸 싫어하는 본성을 타고난 사람이니까요. 이제 당신이 가까이에 두고 있는 '아우드(오리엔탈 루트)'를 제가 얼마나 질투하는지 말씀드려야 할 것 같군요.
아우드로 '나하완드'(5)를 연주할 때는 꼭 찬사의 말과 함께 제 이름을 읊조려 주십시오.
제가 사랑하는 곡일 뿐 아니라, 카알라일(6)이 선지자 마호메트를 찬미했듯이 저도 그 곡을 찬미하니까요.
웅장한 스핑크스 앞에 설 때에도 저를 생각하는 친절을 베풀어 주시겠습니까? 전에 이집트에 갔을 때에는, 일 주일에 두 번씩 그곳에 가서 오랜 시간 금빛 모래 위에 앉아 피라미드와 스핑크스를 바라보곤 했지요. 열여덟 살의 어린 나이에 그 거대한 예술품 앞에서, 거센 바람에 갈대가 휘날리듯, 떨리는 영혼으로 서 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스핑크스는 제게 미소를 지어 주고는, 가슴에 달콤한 아픔을 채워 주었지요.
당신처럼 저도 닥터 수마엘(7)의 찬미자랍니다. 그는 근동(近東) 지역에 새로운 르네상스를 가져올 수 있는, 레바논이 배출한 출중한 인물이지요. 저는 동방에 닥터 수마엘 같은 사람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믿습니다. 그래야 수피교도(이슬람교 신비주의자-옮긴이)들이 이집트와 시리아에 남긴 영향을 없앨 수 있을 겁니다.
혹시 카이랄라 에펜디 카이랄라(8)가 쓴 프랑스어 책을 읽어 보셨는지요?
저는 아직 보지 못했지만, 한 친구가 그 책에 당신에 대해 언급한 부분도 있고, 또 다른 장에서는 저에 대해 다루었다고 알려 주더군요.
그러니 혹시 여분이 있으시면, 제게 한 부 보내 주십시오.
그 보답은 신께서 해주실 것입니다. 지금은 자정입니다.
편안히 주무세요. 신께서 저 대신 그대를 지켜 주시기를.
당신의 신실한,
지브란 칼릴 지브란(9)
(1) 서신 왕래를 통해 더 친숙해지기 전, 지브란은 아랍의 전통적인 섬세한 문장으로 편지를 시작하곤 했는데, 그 부분은 사실상 영어로 번역하기가 매우 어렵다. 예를들면, 그는 마이를 'Hadrat al-adibah al-fadila(출중하고 미덕 높은 작가)'라고 부르곤 한다. 여기에서는 이런 구문을 대신해 '친애하는 지아다 양에게'라는 문구를 넣고 괄호를 쳐서 따로 표시했다.
(2) 지브란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신학적인 어휘를 '성스러운 선동' 혹은 마이의 특별한 '신성한 법'을 의미하는 데 사용한다.
(3) 《알-푸눈》은 1931년 뉴욕에서 나십 아리다(1887-1946)가 창간한 아랍어 저널이다. 아리다는 뉴욕의 '알-라비타 알-콸라미아'의 설립자 중 한 사람으로, 시 모음집인 『어리석은 영혼』, 소설집 『딕 알-진 흠신』 등을 출판했다.
(4) 아민 [알]-리하니(1876-1940)는 레바논 출신 저술가로 레바논 북부 지역인 프라이케에서 태어나 뉴욕으로 이민했다. 그는 아랍어와 영어로 글을 썼으며, 가장 유명한 작품은 『물루크 알아랍』, 『콸브 알-트라크』, 『칼브 루브난』 등이 있다. 아민은 마이와 지브란, 두 사람의 친구였다.
(5) 아랍 악곡
(6) 토머스 카알라일(1795-1881)는 철학자 겸 역사학자로, 케임브리지에서 아랍어를 공부한 적은 없지만, '영웅들, 영웅 숭배와 역사상 영웅시'란 강연에서 선지자 마호메트의 영웅주의를 찬미한다.
(7) 닥터 슈빌 수마엘(1860-1917)은 레바논 출신 의사 겸 저술가다. 옛 의학 서적에 대한 주석과 설명서를 냈다. 그는 마이의 친구이자, 그녀의 문학을 숭배하던 인물이었다.
(8 카이랄라 카이랄라(1822-1930)는 레바논 출신 저술가로, 프랑스 신문 《르 탕》의 동양 지역 국장으로 일했다. 『시리아』라는 제목의 프랑스어 책을 집필했다.
(9) 지브란의 아랍 이름은 지브란 칼릴 지브란(Gibran Khalil Gibran)이었다. 아버지의 이름을 물려받는 아랍의 관례에 따라, 그도 가운데 이름을 그의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았다. 지브란은 아랍어 작품에는 언제나 이 이름으로 서명을 했는데, 그것은 마이 지아다에게 보낸 편지들에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영어로 된 작품에서는, 그가 1895년부터 1897년까지 다녔던 보스턴 학교의 영어 선생님의 권유에 따라, 앞의 '지브란'을 빼고, '칼릴'의 스펠링도 'Khalil'에서 'Kahlil'로 바꾸었다.
[편지2] 뉴욕, 1919년 5월 10일
나의 친애하는 마이 양에게,
『알-마와킵(프로세션)』(1)이 출판되었기에 초판본을 동봉합니다.
이 작품은 형식상 반은 안개이고 반은 현실인, 말하자면 꿈이라는 것을 당신도 금방 알아채시겠지요.
혹시 당신이 이 작품을 조금이라도 맘에 들어한다면, 그대의 칭찬이 은혜로운 현실로 변할 것입니다.
하지만 혹 그렇지 않다면, 이 작품은 안개 속으로 되돌아가겠지요.
그대의 선한 자아에 한없는 인사와 경배를 드리며, 신께서 당신을 지켜 주시고 보호해 주시기를.
당신의 충실한,
지브란 칼릴 지브란
(1) 『알-마와킵(프로세션)』은 지브란이 운율에 맞춰 쓴 시집 중 하나다. 그는 철학적인 아이디어를 상징적으로 그린 그림으로 시집을 꾸몄다. 이 책은 1919년에 출판되었고, 마이 지아다는 이집트 잡지 《알-힐알》에 이 시집의 비평문을 게재했다.
[편지3] 뉴욕, 1921년 5월 30일 월요일 아침
나의 벗 마이, 마리
이상한 꿈을 꾸다가 방금 깨어났습니다. 꿈속에서 당신은 나에 대해 말하고 있었습니다. 무척 엄격하고 냉정한 어조였지요. 하지만 꿈에서 제 마음을 괴롭힌 것은 --- 지금도 너무나 맘에 걸립니다 --- 그대의 이마에 작은 상채기가 있었는데 거기서 피가 뚝뚝 흐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삶에서 우리가 꾸는 꿈보다 더 생각할 가치가 있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꿈을 많이 꾸는 사내입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꿈이 아니면 꿈의 내용을 잊어버리기 일쑤지요. 이 꿈보다 더 선명한 꿈을 꾼 기억이 없습니다. 그런 연유로 이 아침, 마음이 혼란스럽고 걱정스럽습니다. 당신이 그처럼 엄격하고 냉정한 어조로 말한 것은 무엇을 상징하는 걸까요? 당신 이마의 상처는 무슨 의미일까요? 저의 우울함과 슬픔 뒤에 무엇이 깔려 있는지 얘기해 줄 사람이 누구 없을까요?
온종일 마음으로 기도하며 보내야겠습니다. 마음의 침묵 속에서 그대를 위해 기도하고, 우리 두 사람을 위해 기도하렵니다.
신께서 그대를 축복하시고 지켜 주시길.
지브란
[편지4] 보스턴, 1923년 11월 3일
1923년 11월 3일자 소인이 찍힌 봉투에는 이런 내용이 담긴 미켈란제로 조각상 그림 엽서가 들어 있다.
보세요, 마리(1). 미켈란젤로가 얼마나 위대한지. 대리석으로 대단한 거작들을 창조해 낸 이사람은 극도로 부드러워질 수도 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진정한 힘은 부드러움의 딸임을, 유연성은 진정한 단호함의 자녀라는 인생의 본질을 잘 보여줍니다.
어여쁜 얼굴이여, 잘 자요.(2)
지브란
(1) 마이의 본명은 마리였으나, '마이'가 시적이라며 스스로 그렇게 불렀다(110p). 그리고 미리암은 지브란이 지어 부른 마이의 별칭이다(147p).
(2) 애정을 나타내는 아랍식 어구로 번역해 옮기기 힘든 문구이다.
[편지5] 뉴욕, 1929년 12월 10일
마리, 나의 사랑하는 벗이여,
오늘 당신 아버님께서 황금빛 지평선 너머로 떠나셨음을 알았습니다.
우리 모두 그곳을 향해 순례를 떠나게 되겠지요.
제가 무슨 말씀을 드려야 좋을까요?
마리, 그대는 생각이든 말이든 한없이 숭고한 위로를 듣고 싶어하는 분이지요.
하지만 제 마음은 그대 앞에 서서 조용히 그대 손을 잡고, 그대의 영혼이 깃든 모든 것을 느껴 보고 싶을 따름입니다.
그대 곁에 있지만 아직도 이방인인 이 사내는 그대의 느낌을 공유할 수 있답니다.
신께서 마리 그대를 축복하시기를. 그리고 그대의 매일 밤과 매일 낮을 지켜 주시기를.
그대의 벗을 대신해 신께서 그대를 감싸 주시길.
지브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