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소개] 『고요하여라 나의 마음이여』
이 시집은 칼릴 지브란이 젊은 시절 아랍어로 쓴 시들 중에서 열 두 편을 골라 영역한 <Prose Poems>(1934, Andrew Gareeb 영역)를 다시 우리말로 번역한 것입니다. 진선출판사에서 1989년 9월 25일 발행했고 나희덕 시인이 옮겼습니다. 역자가 참고한 텍스트는 <Prose Poems>, Alfred A.Knopf, New York, 1987판입니다.
주요 목록은 “사원의 문 앞에서, 묵시록, 영혼, 밤의 노래, 내 영혼이 나에게 충고했네, 내가 태어난 날에, 고요하여라 나의 마음이여, 주검의 도시에서, 밤, 시인, 명성, 지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수록된 시는 대부분 길이가 긴 산문시이기 때문에 Prose Poems라는 제목이 붙은 것 같습니다. 그동안 번역된 칼릴 지브란의 작품들이 대부분 시적 성격을 지닌 산문이거나, 시라고 하여도 짤막한 경구의 성격을 지닌 것이었기에, 여기에 소개된 시들을 통해서는 좀더 깊이있게 그의 시세계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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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1] 고요하여라 나의 마음이여
1
고요하여라, 나의 마음이여
우주는 너의 소리를 듣지 않는다네.
고요하라, 나의 마음아
슬픔과 탄식으로 무거워진 하늘은 너의 노래들을 견딜 수 없으리라.
고요하여라
밤의 환영들은
네 신비의 속삭임에 귀 기울이지 않고
어둠의 행렬은
네 꿈 앞에서 멈추지 않을 것이기에,
고요하라, 나의 맘이여
새벽녘까지 고요하여라.
끈기있게 아침을 기다리는 자
힘차게 아침을 맞을 것이요
빛을 사랑하는 자 빛의 사랑을 받으리니
고요하여라, 나의 마음아
나의 말을 들어보아라.
꿈 속에서 나는
사나운 화산 위에서 노래하고 있는
지빠귀 소릴 들었고
흰 눈 위로
고개를 내미는
나리꽃 한 송이를 보았다네.
묘비 사이에서 춤추고 있는 벌거벗은 천녀(天女)와
해골을 갖고 놀며 웃고 있는 아이를 보았네.
이 모든 걸 나는 꿈에서 보았다네.
잠에서 깨어 옆을 둘러보다가
사납게 폭발하는 화산을 보았네.
하지만 지빠귀의 노래소린 들을 수 없었지.
언덕과 골짜기에 흰 눈을 흩뿌리는 하늘은
그 흰 수의로 나리꽃을 고요히 감싸고 있었네.
또한 줄지어 서 있는 무덤을 보았지.
고요한 세월 앞에 서 있는 무덤
거기엔 춤추는 이도 기도하는 이도 하나 없었네.
그리고서 바람의 웃음소리만 들려오는
해골의 언덕을 보았네.
슬픔과 탄식밖에 보이지 않았지.
그러면 꿈의 즐거움은 어디로 떠나갔나?
우리 잠 속의 빛나는 광채는 어디로 숨었나?
그 빛의 이미지는 어떻게 사라졌나?
그 갈망의 그림자가 잠과 함께 돌아갈 때까지
영혼은 어떻게 참고 견뎌낼 수 있을까?
2
고요하여라, 나의 마음이여
나의 말을 들어보아라.
나의 영혼이 오래고 강한 나무였던 건
바로 어제의 일이었지.
대지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무한한 창공에 가지를 펼치며
봄에 꽃 피우고, 여름에는 열매를 맺었네.
가을이 되자
나는 은쟁반에 그 과일을 모아
네거리 갈림길에 놓아 두었네.
지나는 사람들이 열매를 집어먹고
제 갈 길을 가도록.
가을이 지나
가을의 노래는 흐느낌과 비가(悲歌)로 바뀌었고
나의 쟁반을 바라보니
단 한 개의 과일만이 남아 있었네.
맛을 보니, 그건 알로에처럼 썼고
덜 익은 포도처럼 시더군.
"슬프도다, 나는 사람들의 입술에 저주를 내렸고
그 마음에 증오를 채웠구나.
나의 영혼아
그렇다면 너는 대체 무엇을 한 것이냐,
네 뿌리가
대지의 가슴에서 빨아들인 달콤함과
네 큰 가지들이
태양의 빛에서 마신 향기로움을 가지고
대체 무엇을 한 것이냐."
그 자리에서
내 영혼의 오래고 튼튼한 나무를 뽑아버렸네.
과거로부터 베어내고
천 번이나 되는 봄과 가을의 기억에서
지워버렸다네.
그리고 또 다른 곳을 택해
내 영혼의 나무를 심었다네.
시간의 길목에서 멀리 떨어진 들판에
나무를 세우고
내 눈물과 피를 뿌려주면서
그 옆에서 밤을 지새웠다네.
"피 속에는 향기가 있고
눈물에는 달콤함이 있지."
봄이 되자
내 영혼의 나무는 다시 꽃을 피웠고
여름이 다가오자 열매를 맺었다네.
가을이 되어서
다시 한번 익은 과일을 모아
사람들이 모이는 길목에 금쟁반에 담아 내두었네.
많은 이들이 지나갔지만
아무도 집으려 하지 않았네.
하나 집어 먹어보니, 꿀처럼 달콤했지
과즙처럼 감미롭고
쟈스민의 향처럼 은근하며
바벨론의 포도주처럼 달았다네.
나는 큰 소리로 외쳤네.
"사람들은 입술에 머무는 행복이나
마음 속에 필요한 진실은 원치 않는구나.
행복은 눈물의 딸이고
진실은 고통의 아들이기에."
그리고서 시간의 길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심겨진
내 영혼의 외로운 나무 그늘에 돌아와 앉았네.
3
고요하여라, 나의 마음이여
새벽까지 고요하여라.
고요하여라
하늘은 죽은 것들의 내음으로 무거워졌고
네 살아있는 숨결을 들이쉬지 못한다네.
고요하여라, 나의 마음이여
나의 말을 들어보라.
바로 어제, 나의 생각은 한 조각 배와도 같이
대양의 파도에 흔들리며
해변에서 해변으로 바람따라 다녔네.
내 생각의 배는 텅 비어 있었고
무지개 색의 물감으로 가득찬
일곱 개의 유리병이 있을 뿐이었지.
바다를 떠다니는 게 지루해지자, 난 말했네.
"내 생각의 빈 배와 함께
내가 태어난 항구로 돌아갈 것이다."
항해를 하면서
나는 일곱 색깔로 배의 옆면을 칠하기 시작했네.
지는 해처럼 황금 색으로
하늘같이 푸르게
진홍빛 아네모네처럼 붉게 빛났지.
더불어 내 배의 돛과 키에도
사람들의 눈을 끌 그림을 그렸다네.
그리고서 보니, 내 생각의 배는
바다와 하늘, 이 무한한 두 곳 사이를 떠도는
예언자의 모습이었네.
나의 배가 항구에 닿자
보라, 모든 사람들이 나를 만나러 와 있구나.
고함치고 즐거워하며 나를 환영하고
도시 안으로 맞아들였네
탬버린을 치면서 갈대피리를 불면서
이 모든 것은 내 배가 그들에게
매혹적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네.
그러나 내 생각에 배에 올라온 이는 아무도 없었고
또 내 배가 빈 채로 항구로 돌아왔음을
아는 자도 없었다네.
나는 혼자 중얼거렸네.
"나는 사람들을 현혹하고 있어.
일곱 색깔 유리병으로
그들의 눈과 마음 속의 눈, 모두를 속이고 있는 거야."
일 년이 지나고서 다시금
내 생각의 배에 올라 바다로 나갔네.
동쪽 섬으로 배를 몰아서는
몰약과 유황, 백단향을
남쪽 섬으로 찾아가서는
황금과 비취, 에머랄드와 모든 보석을
복쪽 섬에서는
보기드문 비단과 벨벳, 온갖 자수품을
그리고 서쪽 섬으로 가서는
갑옷과 창, 검을 구했다네.
이렇게 내 생각의 배를
지상의 값 비싸고 진귀한 것으로 가득 채웠네.
내 도시의 항구로 돌아오며 마음 속으로 말했다네.
"이제야말로 나를
찬양받을 만한 사람으로 여겨주리라.
이제 사람들은 노래하고 피리부는 시장터로
나를 인도하리라."
그러나 보라, 항구로 돌아왔을 때
아무도 나를 환영해주거나 만나러 오지 않았다네.
도시의 거리를 홀로 들어갔으나
아무도 나을 돌아보지 않았지.
시장에 서서
내가 가져온 대지의 열매와 값진 물건에 대해
모두 말해주었지만
사람들은 비웃은 얼굴로 조롱하며
내게서 등을 돌렸다네.
낙심한 나는 항구로 돌아왔네.
내 배를 보자마자, 나는 깨달았네
값진 물건을 찾으며 항해하는 동안
내가 주의하지 않았던 것이 있었음을.
그래서 나는 굴욕감으로 치를 떨며 소리쳤네.
"아------
바다의 파도가
내 배의 일곱 색채를 씻어버렸구나.
이제 해골처럼 남아있을 뿐
바람과 폭풍, 햇볕이 내 배의 돛에서
놀라움과 기쁨의 이미지를 지워버렸으니
빛 바래고 갈갈이 찢긴 모습 말고
이제 무엇이 더 보이겠는가.
바다 위를 떠도는 상자에
지상의 값 비싼 보물을 모아서
사람들에게 나 돌아왔건만
내게서 등을 돌리는구나
그들은 다만 밖으로 드러난 것밖에는
보지 못하는구나."
바로 그 순간, 내 생각의 배를 버리고
주검의 도시를 찾아갔네.
거기서 나는 무덤 한가운데 앉아서
그 무덤의 비밀을 깊이 생각해 보았네.
고요하여라, 나의 마음아.
여명이 밝아올 때가지 고요하여라.
고요하여라
폭풍우가 네 속의 속삭임을 조롱한다 해도.
고요하여라, 내 마음이여, 새벽녘까지
아침을 참을성있게 견디는 자
아침이 그를 부드럽게 안아주리니.
보아라, 나의 마음이여
새벽이 다가오는 것을.
말해보라, 너에게 아직 말할 힘이 남아 있다면.
보아라, 나의 마음아, 아침의 행렬을
아침을 맞는 네 속의 노래를
밤의 침묵이 휘저어 놓진 않았는가?
보아라, 골짜기 위를 나는 비둘기와 지빠귀를.
새들과 함께 날 그대의 날개는
밤의 두려움으로 더 강해지지 않았는가?
보아라, 목자가 우리에게서 양떼를 인도하는 것을.
푸른 풀밭으로 따라가려는 그대의 바램을
밤의 그림자가 재촉하지 않았는가?
보아라 포도밭으로 서둘러 가는 젊은 청년과 아가씨를.
일어나서 그들과 함께 가지 않으려는가?
일어나라, 나의 마음이여.
일어나서 새벽과 함께 움직여라.
밤이 지나가고 그 두려움은
검은 꿈과 함께 사라져버릴 것이기에.
일어나라, 나의 마음이여
노래에 그대의 목소리를 실어보라.
새벽과 함게 노래 부르지 않는 건
어둠의 자식 뿐이기에.
[시2] 명성
썰물의 바닷가 모래 위로 나는 걸었네.
구부리고 앉아 모래 위에 금을 긋고
그 금 속에 나의 생각과
내 영혼의 외침을 적어 놓았네.
그리고 밀물이 되어
나는 바로 그 자리에 돌아왔지만
내가 썼던 흔적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네.
눈 먼 듯이 걸어온
누군가의 지팡이 자국이 남아있을 뿐.
[시3] 지구
지구는 힘껏 지구로부터 튕겨져 나와
위엄있고 자랑스럽게 지구 위로 움직인다네.
지구로부터 지구는 왕들의 궁전을 세우고
모든 백성을 위하여
높은 탑과 훌륭한 사원을 세우며
신비한 신화, 엄격한 법률, 정교한 교리를 만드네.
이 모든 것이 이루어졌을 때
지구는 일에 지치게 되고
빛과 어둠으로부터 잿빛 그늘을 만들어
포근한 잠의 환상과 황홀한 꿈에 잠기네.
지구의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져서
이윽고 그 깊고 고요한 잠 속에
모든 것이 갇혀버렸네.
그 때 지구는 지구를 불러내어 말하네
"보아라, 나는 자궁이고, 나는 무덤이다.
자궁과 무덤인 나는 영원하리니
아, 저 별들이 사라질 때까지
저 태양이 한 줌 죽음의 재가 될 때까지."
[시4] 밤의 노래
고요한 밤이 되어
꿈들은 침묵 속으로 숨는다네.
달이 떠오르고 있고 ---
그녀는 낮을 보는 눈을 지니고 있지.
오라, 들판의 딸이여
가자꾸나, 연인들이 만나는 포도밭으로.
그러면 아마도 사랑의 포도주로
우리의 갈증을 달랠 수 있으리.
귀 기울여보라
나이팅게일의 노랫소리 골짜기로 흘러내리고
언덕은 푸른 박하향으로 가득 찼네.
두려워하지 마오, 사랑하는 이여
별들이 우리 만남의 비밀을 지켜주리라
부드러운 밤안개가 우리의 포옹을 가려주듯이.
두려워마오 ---
드진스*의 젊은 신부(新婦)는
천녀*의 눈도 미치지 않는 그녀의 매혹적인 동굴에
사랑에 취한 채 잠들어있네.
드진스의 왕이 지나간다 해도
사랑은 그에게서 등을 돌리리.
그는 나와 같은 애인이 아니기에
어찌 견딜 수 없는 자기 마음을 드러내리오?
※ 드진스 : 회교 신화에 나오는 천사보다 하위의 초자연적 존재로서 사람 또는 동굴의 모습을 하고 사람의 일에 마술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함.
※ 천녀(天女) : 매우 아름답고 요염한 여자.
[시5] 묵시록
밤이 깊어 대지도 가면을 내려놓고 잠이 들 무렵
나는 잠자리에서 나와 바다를 향하네.
"바다는 끝내 잠들지 않고
잠 못 이루는 영혼을 위로해주지."
바닷가에 이르렀을 때는
이미 엷은 안개가 산꼭대기에서 내려와
마치 처녀의 얼굴을 가린 베일처럼
온 세상을 덮고 있었네.
그곳에 서서, 파도를 바라보고 그들의 노래를 들으며
나는 바다 저편에 있는 어떤 힘에 대하여 생각하였네.
그 힘이란 폭풍과 함께 떠돌고
화산과 함께 폭발하고
미소짓는 꽃들과 함께 웃고
속삭이는 시냇물과 함께 노래하는 것이었네.
문득 나는 뒤돌아서서
근처의 바위에 앉아있는 세 형상을 보았네.
안개에 가려 보일 듯 말 듯한 그들을.
알지 못할 어떤 힘에 이끌려
그들이 앉아있는 바위 곁으로 천천히 다가갔네.
그곳에는 나의 환상을 휘저으며
마음을 사로잡는 마력이 깃들어 있었기 때문에
몇 발자국 떨어져서 그들을 바라보았네.
그 순간 세 형상 중 하나가 일어나
바다 깊은 곳에서 울려나오는 듯한 음성으로 말하였네.
"사랑 없는 삶은
꽃이나 열매 없는 나무와 같다.
아름다움 없는 사랑은
향기 없는 꽃이나 씨 없는 열매와 같다.
삶과 사랑과 아름다움, 이 세 가지는 한 몸인데
바꿀 수도 나눌 수도 없는
무한하고 자유로운 존재들이다."
그때, 두 번째 형상이 일어나
물결이 밀려오는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네.
"저항 없는 삶은
봄 없는 계절과 같다.
정의롭지 못한 저항은
불모의 사막 속의 봄과 같다.
삶과 저항과 정의, 이 세 가지는 한 몸인데
그들과 바꿀 수도 나눌 수도 없는 존재들이다."
또, 세 번째 형상이 일어나
우레 같은 음성으로 말하였네.
"자유 없는 삶은
영혼이 깃들지 않은 육체와 같다.
사상 없는 자유는
혼란스러운 영혼과 같다.
삶과 자유와 사상, 이 세 가지는 영원한 한 몸인데
끝내 사라지거나 지나가버리지 않는 존재들이다."
마지막으로, 세 형상들이 일어나
장엄하고 두려운 음성으로 말하였네.
"사랑과 사랑이 낳은 모든 것
저항과 저항이 창조한 모든 것
자유와 자유가 가져온 모든 것
이 세 가지는 모두 신의 형상들이니···
그 신은
한정되 의식 세계에 살아있는 무한의 정신이다."
그리고나서, 보이지 않는 날개들의 떨림과
그 울림으로 가득한 침묵이 흘렀네.
나는 들려오던 음성의 메아리에 귀 기울이며
눈을 감았네.
내가 두 눈을 떴을 때
안개가 낮게 깔린 바다 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네.
그 바위 쪽으로 더 가까이 다가갔지만
하늘 위로 떠오르는 향기로운 기둥, 그 이외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네.
[시6] 내 영혼이 나에게 충고했네
1
내 영혼이 나에게 충고했네
다른 이들이 싫어하는 모든 걸 사랑하라고
또한 다른 이들이 헐뜯는 사람들과 친구가 되라고.
사랑이란, 사랑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사랑받는 사람까지도 고귀하게 만든다는 걸
내 영혼은 보여주었네.
예전에는 사랑이
가까이에 피어난 두 꽃 사이의 거미줄과 같았네.
그러나 이제 사랑은 시작도 끝도 없는 후광(後光) ---
지금까지 있어온 모든 것을 감싸고
앞으로 있을 모든 것을 에워싼 채
영원히 빛날 후광과도 같다네.
2
내 영혼이 나에게 충고했네
형태와 색채 뒤에 숨겨진 아름다움을 보라고
또한 추해보이는 모든 것이 사랑스럽게 보일 때까지
잘 살펴보라고.
내 영혼이 이렇게 충고하기 전에는
아름다움을
연기기둥 사이에서 흔들리는 횃불과 같다고 생각했지만
이제 연기는 사라져 없어지고
불타고 있는 모습만을 볼 뿐이라네
3
내 영혼에 나에게 충고했네
혀끝도 목청도 아닌 곳에서 울려나오는
목소리에 귀 기울이라고
그 날 이전에는 나의 귀가 둔하여
크고 우렁찬 소리밖에는 듣지 못했네.
그러나 이제 침묵에 귀 기울이는 법을 배웠으니
시간과 우주를 찬송하며
영원의 비밀을 드러내는 침묵의 합창을 듣는다네.
4
내 영혼이 나에게 말했네
잔에 따를 수도 없고
손에 들 수도
입술로 느낄 수도 없는 포도주로
나의 갈증을 풀라고.
그 날까지 나의 갈증은
샘에서 솟아난 한 모금으로도 쉬이 꺼지는
잿불 속의 희미한 불씨였네.
허나 이제 나의 강한 동경(憧憬)은
하나의 잔이 되었고
사랑이 나의 포도주로
그리고 외로움은 나의 즐거움으로 변하였다네.
5
내 영혼이 나에게 충고했네
보이지 않는 것을 찾아보라고.
우리가 매달려 온 것은
우리가 갈망하는 것들이었음을
내 영혼은 보여주었네.
예전에 나는, 겨울에는 따스함으로
여름에는 서늘한 미풍으로 만족했으나
이제 내 손가락들이 안개처럼 되어
붙잡았던 모든 것들을 떨어뜨려
보이지 않는 나의 갈망들을 뒤섞어버리려 하네.
6
내 영혼이 나를 초대했네
뿌리도 줄기도 꽃도 없는 보이지 않는 나무에서
향기를 맡을 수 있도록.
예전에 나는 정원에서 향기를 찾았었고
향긋한 풀잎이 담긴 항아리와 향기로운 그릇에서
그걸 찾았었네.
그러나 이제 타버리지 않는 향기만을 느낄 수 있네.
지구의 모든 정원과 우주의 모든 바람보다도
더욱 향기로운 공기를 숨쉬고 있네.
7
내 영혼이 나에게 충고했네
미지의 것이 나를 부를 때
"나는 따르겠다." 대답하라고.
지금까지는 시장에서 외치는 목소리에만 대답해왔고
잘 닦여진 길로만 다녔었네.
하지만 이제 나는 그 깨달음을 한 마리 말로 삼아
미지의 것을 찾아 나서게 되었고
또한 길은 그 험한 정상에 오를 수 있도록 놓인
사닥다리가 되었다네.
8
내 영혼이 나에게 시간을 헤아리라고 훈계했네
"어제가 있었고, 또 내일이 있을 것이다." 말하면서.
그 때까지 나는
과거란 단지 잃어버린 채 잊혀질 시대라고 생각했었고
미래란 내가 얻을 수 없는 시대라고 여겨왔었네.
이제는 이것을 배웠다네.
덧없는 현실 속에서도 모든 시간이란
사간 속에 있는 모든 것과 더불어
언젠가는 얻어지는 것이며
마침내는 실현되리라는 것을.
9
내 영혼이 나에게 말하였네
"여기에, 저기에, 또 너머에."라는 단어들에 의해
나의 자리가 한정될 수 없다는 것을.
지금까지 나는 언덕 위에 서 있었고
다른 모든 언덕들이 아득하고 멀게만 느껴졌지만
이제야 비로소 내가 서 있는 언덕이
실로 모든 언덕이기도 하다는 것과
내려가는 이 골짜기도
모든 골짜기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되었네.
10
내 영혼이 충고했네
다른 이들이 자고 있을 때 깨어서 보고
그들이 깨어 있을 때 베개를 찾아 나서라고.
내 생애 동안 나는 그들의 꿈을 알아보지 못했고
그들 역시 내게 그러했었네
그러나 이제, 낮에는 내 꿈 속을 날아다니고
사람들이 자는 밤에는 그들이 자유로움을 보며
그들의 자유를 함께 누리게 되었네.
11
내 영혼이 나에게 충고했네.
지나친 칭찬에 우쭐해 하지도 말고
비난받았다고 괴로워하지도 말라고.
예전에는 내 자신이 하는 일의 가치를 의심했었지만
이제 이것을 배웠다네.
나무는 칭찬이나 두려움, 부끄러움이 없이도
봄이면 꽃 피고
여름에 열매 맺고
가을에는 잎을 떨구고
겨울에는 홀로 앙상해진다는 것을.
12
내 영혼이 나에게 자신있게 말해 주었네
내가 난쟁이보다 크지도 않고
거인보다 작지도 않다는 것을.
그전에는 사람들을 두 부류로 나누어 생각했지.
비웃거나 불쌍히 여겨야 할 약한 사람들과
복종하거나 아니면 저항해야 할 힘센 사람들.
그러나 모든 이들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같은 흙으로 지어졌다는 걸 알게 되었네.
나를 이루는 요소가 그들의 요소이기도 하며
나의 내적 자아가 그들의 자아이기도 하다는 것을.
나의 갈등은 그들의 갈등이기도 하며
그들의 순례길이 나 자신의 것이기도 하네.
그들이 관습에서 벗어났다면
나 역시 벗어난 사람이요
선한 일을 한다면
나도 그 선행에 동참한 것이네.
그들이 일어서면 나도 함께 일어서고
뒤로 물러나 있으면
나 역시 그들과 함께 하리라.
13
내 영혼이 나에게 가르쳐 주었네
내가 지닌 빛이 나의 빛이 아니며
나의 노래가 내 안에서 만들어진 게 아니라는 걸.
내가 빛과 함께 다닐지라도
나 자신 빛이 될 수 없고
줄이 달린 악기는 될 수 있어도
나 자신 그 악기를 켜는 사람은 아니라네.
14
내 영혼이 나와 내 형제를 깨우쳐 주었네.
때로는 당신의 영혼이 당신을 깨우쳐 줄 것이네.
당신이 나와 같듯이
우리들 사이에 다른 것은 없네.
내가 침묵의 언어로 내 안의 것을
말할 때를 제외하고는
당신이 당신 안에 있는 것을
스스로 지켜보며 경계하는 것이
나의 수많은 말보다 더 좋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