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소개] 『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야』
류시화 시인이 2023년 12월에 출간한 산문집입니다. 서문을 제외하고 총 43편의 산문이 실려 있습니다. 책 소개를 대신하여 출판사의 안내문을 게시합니다.
30만 명의 독자가 읽고 독일과 스페인 등 5개국에서 번역된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에 이은 신작 산문집. 많은 작품을 통해 그만의 인생관을 세상에 알린 작가로 여행자로 살아가면서 깨달은 것들이 다채로운 이야기 속에 담겨 있다. 작가 자신의 경험에서 비롯된 진실의 힘이 느껴진다. 인간에 대한 더욱 깊어진 이해에 문체의 매력이 더해져 서문을 읽는 순간부터 기대감이 커진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떠난 여행지에서 아름다운 풍경에 압도당하는 기분의 연속.
그렇듯이, 그의 글에는 가벼움과 깊이가 함께한다. 깃털의 가벼움이 아니라 새의 가벼움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마주할 때 사람은 말과의 관계가 돈독해진다. 전달된다고 믿지 않으면 글을 쓸 수 없다고 작가는 말한다.
“인생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은 ‘다른 인생’이다. 새는 해답을 갖고 있어서 노래하는 것이 아니다. 노래를 갖고 있기 때문에 노래하는 것이다. 삶이 힘든 시기일수록 마음속에 아름다운 어떤 것을 품고 다녀야 한다. 그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한다.”
한 편 한 편 읽어 나가면 불꽃놀이가 터지는 유리컵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마음속으로 다양한 부호들이 쏟아진다.
(이상 출판사 안내문에서 인용)
▣ 『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야』 / 류시화 / 수오서재 / 2023년 12월 21일 발행.
◉ 내용 보기
[1] 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야 (13~20쪽)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아침 산책길에서였다.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어서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웠지만, 삼십 대 중반쯤으로 보였다. 바닷가 오솔길을 그녀는 단발머리를 하고 서쪽에서 걸어오고 나는 바닷바람에 장발을 날리며 동쪽에서 걸어가다가 정면으로 마주쳤기 때문에, 나의 범상치 않은 행색을 알아본 그녀의 예리한 시선을 피할 도리가 없었다. 대개 이런 경우, 서로의 산책을 방해하지 않도록 나 아닌 척하거나 눈 흰자위를 치켜뜨고 정신이 온전치 않은 시늉을 하지만 그럴 틈이 없었다.
그녀는 반갑게 인사하며 자신도 근처 동네에 살고 있다고 했다.
(중략)
내가 가장 많이 듣는 이야기가 무엇인 줄 아는가? 자신이 상상한 인도가, 자신이 기대한 명상 센터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만나 보니 자신의 생각 속 시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럴 때 나는 내가 자유 영혼임을 느낀다. 타인의 예측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존재라면 생생하게 살아 있다고 할 수 있는가?
내가 당신을 만났을 때, 당신의 상상 밖의 인물이면 더 좋겠다. 불행과 행복의 내력이든, 상실과 성취의 경험이든 뜻밖의 이야기를 당신이 가지고 오기를 바란다. 우리는 두려움에 맞서 불가능한 사랑에 빠지고, 준비하지 않았던 일을 경험하기 위해 이 행성을 여행 중이니까. 가슴에 믿을 품고 별에 닿기 위해.
당신과 마찬가지로, 이 인생은 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다. 내가 생각한 세상이 절대 아니며, 내가 상상한 사랑이 아니다(아픔이 너무 크다). 신도 내가 생각한 신이 아니다(때로 인간에게 가혹하다). 지구별은 단순히 나의 기대와 거리가 먼 정도가 아니라, 좌표 계산이 어긋나 엉뚱한 행성에 불시착한 기분이 들 정도이다.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모든 일들이 나의 제한된 상상을 벗어나 훨씬 큰 그림 속에서 펼쳐지고 있으니.
(하략)
만약 내가 이 세상 떠나며 영혼들의 교차로에서 이제 막 세상에 태어나려고 엇갈리는 한 영혼을 만난다면, 나는 그 영혼에게 말하리라.
“당신이 상상하는 지구 행성이 아닐 거야. 당신이 생각하는 인생이 아닐 거야. 그래서 하루하루가 난해하면서도 설레고 감동적일 거야. 자신의 관념과 기준 속에 갇혀 있지만 않는다면, 당신이 상상한 것보다 더 좋은 것들을 발견하기 위해 눈을 크게 뜬다면.”
[2] 오늘, 인어를 만났어요 (195~199쪽)
글은 단순하게 쓰는 일이 가장 어렵다. 작가라면 미사여구를 동원해 글을 쓰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나 역시 이십 대 초반에 신춘문예로 등단해 자칭 언어의 연금술사로 행세할 만큼 화려하고 감각적인 문체를 자랑했다. 번역을 하면서도 나만의 특징적인 문장을 구사하려고 힘썼다. 독자의 심금을 울리는 부사와 형용사를 곳곳에 배치하면서.
그러나 나는 안다, 중첩된 수식어나 멋진 묘사 없이 글쓰는 것이 더 어렵다는 것을. 지금은 글을 쓴 다음 부사와 형용사들을 지워 나가는 것이 마지막으로 하는 일이 되었다. 편집자에게도 원고 교정 시 수사적인 표현을 가능한 한 덜어 내라고 요청한다. 주제는 빈약하고 표현만 현란한 작가로 남는 것만큼 두려운 일은 없다.
한글의 2만여 개 부사와 형용사를 나열한다 한들 그것이 글의 진정성을 심화시켜 주지는 않는다. 진실하지 않다면 그 단어들이 무슨 소용인가? 또 진실하다면 굳이 그런 수식어들이 왜 필요한가? 마찬가지로, 사람은 자신의 있는 그대로를 보여 주는 일이 더 어렵다. 상대방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고 스스로의 에고를 만족시키기 위해 자신을 멋지게 과장하기란 오히려 쉽다.
사람은 자신에게 없는 것일수록 있는 척한다. 부족하거나 결여된 것일수록 많이 가진 것처럼 과시한다. 세속의 일만이 아니다. 명상이나 요가 수행이 깊지 않은 사람일수록 자신이 수행한 햇수를 내세운다. 내가 아는 수도승은 출가 이후 평생을 하안거, 동안거마다 선방에서 지냈으나 그 사실을 입에 올리는 적이 없다. 다만 여름과 겨울이면 그가 지금 선방에 앉아 있겠구나, 하고 나도 따라서 허리를 바로 세우고 앉게 된다. 내면에 내세울 것이 적은 사람일수록 명품을 들고 다닌다. 진짜 무서운 사람은 아무것도 필요없는 사람, 오직 모를 뿐인 사람이다.
고요한 밤이 되어 낮 동안 내가 풀어 놓았던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이면, 혹은 생의 마지막에 이르러 일생 동안 내가 쓴 문장들이 소환되는 시간이 되었을 때도 부끄럽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 좋은 글은 가슴에 새겨지는 점자처럼 다가온다. 생텍쥐페리가 말했듯이, 더 이상 덧붙일 게 없을 때가 아니라 더 이상 덜어낼 게 남아 있지 않을 때가 완벽에 이르는 순간이다.
(중략)
어떤 세계를 진실로 경험하면 말을 잃는 법이다. 많은 말을 하는 사람은 그것을 깊이 경험하지 않았거나 말을 꾸며 내는 것일 가능성이 크다. 글이든 깨달음이든 종교든 다르지 않다. 장황하게 자신을 포장하거나 교묘히 말을 만드는 자는 거짓의 능력자일 뿐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 말을 하지만 의미 없는 말과, 의미는 있지만 말할 수 없는 말이 있다.
“내 언의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이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언어에 대해 고찰한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의 명언이다.
진정으로 경험하는 순간 정신에 빛이 스며들어, 말의 유희를 벗어나 깊어지고 겸허해진다. 진실이 우리 안에 숨 쉬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과 침묵만이 거주하는 공간이 생겨난다. 자신에게로 돌아오라는 의미가 이것이다.
[3] 입술은 마지막으로 발음한 단어를 보존한다 (242~246쪽)
(전략)
인간의 입술은 마지막으로 발음한 단어의 형태를 보존한다고 한다. 상대방에게 하는 마지막 말도 입술의 형태로 그 사람 가슴에 남을 것이다.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누군가에게 한 마지막 말은 무엇이었을까? 헤어진 후에도 남는 그 말은? 영어의 '말word'과 '칼sword'이 같은 단어를 가진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 둘을 잘못 사용할 때 같은 결과를 낳는 것도.